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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니 Nov 17. 2019

어쩌다 을지로 #2

- 통보



"잠깐 시간 괜찮니?"  


새로운 회사로 언제 출근하냐며 내 근황을 물어보시던 아버지께서는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갑자기 저녁에 가족끼리 오랜만에 외식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딱히 저녁 약속이 없었던 나는 흔쾌히 동의하였고, 아버지는 재입사 축하 기념으로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고 통보하셨다(그런데 아버지, 혹시 제 카드로 긁을 예정은…). 


아버지가 외식을 하자는 것은 보통 나에게 진지하게 하실 말씀이 있을 때다. 그래서 사실은 외식하자고 하실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번에는 또 어떤 아젠다일까. 결혼? 건강? 운동? 

그리고 우리 동네 안심 한우집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점심까지 동네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에 조용히,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 썩 좋은 장소가 아니다(ㅠㅠ). 


그렇다고 매번 신라호텔 팔선이나 롯데호텔 도림 같은 조용하고 럭셔리한 곳을 갈 수도 없으니 어떻게 하랴.
얇디얇은 나의 지갑을 탓할 수밖에. 




지글지글 고기 익는 소리에 침이 넘어간다. 그래도 단골이라고 주인아저씨께서 안쪽 명당자리로 안내해주셨다. 고기가 익기도 전에 맥주를 시키신 아버지는 나와 함께 맥주 반잔 정도 비우신 후, 본격적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이번에 들어가면 두 번 다시 창업하지 말고, 가급적 오래 쭉 다니렴."

"네?"

"사업 욕심 내지 말고, 크고 안정적인 회사에서 50, 60대 될 때까지 다니란 이야기야."

"맞아! 토니 너는 태생적으로 사업이랑 안 맞아. 공부만 하던 애가 사업은 무슨 사업이니! 장사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얘."  


어머니가 옆에서 과일 사라다를 먹다 말고 열변을 토하신다. 아, 이거 협공이구나. 두 분은 항상 아웅다웅하시다가도 아들과 관련된 이슈에는 한 편이 되신다. 


평생 교직에 계시다가 은퇴하신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안전지향적인 삶을 사셨고, 정적인 삶을 좋아하신다.

그래서 골프보다는 바둑을 좋아하시고, 독서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이다.

2년여 전, 내가 갑자기 멀쩡한 회사를 뛰쳐나와 갑자기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는 엄청 실망하셨지만 겉으로 내색을 전혀 안 하시고 성공하라고 토닥여 주셨다(반대로 어머니는 등짝 스매싱을 선물로 주셨다). 


어쨌든 호기롭게 스타트업인지 뭔지를 하겠다고 나선 아들이 1년 반 만에(정확히는 1년 5개월 7일)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폐인처럼 집에서 눌러앉아 있다가 간신히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는데 또 허튼짓 할까 봐 정신 교육을 시키시는 거군!이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사실 이건 내가 예상했던 아젠다이다. 후후.  


"그리고 니 엄마랑 상의했는데, 이제 너도 나이가 있고 하니 입사하게 되면 좀 독립해서 살았으면 하는데..니 생각은 어떠니"

"그래 얘, 안 그래도 좁은 집에서 너랑 니 형까지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내가 못살겠어." 


엥? 이게 대체 무슨...     


"헉, 2주밖에 안 남았는데 그 사이에 집을 구해서 나가라고요?"

"아니 당장 그러라는 건 아니고 그래도 연말까지는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해서 독립하는 게 어떠냐 이거지." 


나는 살짝 애처로운 눈빛으로 엄마를 쳐다보며 헬프를 요청했다. 


"엄마는 내가 집에서 다니는 게 더 좋지 않나?"

"어휴 서른셋 먹은 아들을 데리고 살려니 힘들어 죽겠어. 친구들 다 장가가는데 혼자 뭐 하는 거야. 이 참에 독립해서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하게 살자 응?" 


어? 어?? 이러면 나가리인데... 


부모님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성품이셔서, 저 정도 Tone&Manner로 이야기하신 거라면 분명히 나에게 나가 달라고 요청한 거나 마찬가지다. 안보리 의장 성명 급이랄까. 


사실 30대 노총각이 부모님과 함께 살면, 하루 종일 잔소리 퍼레이드를 듣는 등 불편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집에 계속 있으려는 이유는, 악착같이 월세나 전세 비용을 아껴서 나중에 결혼할 때 결혼 비용으로 쓰기 위함이다. 서울시 집값이 장난이 아니잖아? 그러니 돈 아껴 써 집도 사고, TV도 사고, 플스도 사고, 엑박도 사고…(응?)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과년한 아들을 데리고 살아주시는 성은에 보답하고자 큰돈은 아닐지언정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드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자식이기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고 내가 개기면(..) 더 눌러앉아서 살 수도 있지만 그건 도리가 아닌 것 같고, 이제 진짜 출가할 때가 되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이 다소 빠진 맥주를 한 잔 쭉 들이켜면서 효자답게 부모님이 바라던 대답을 했다. 


"그럼 한 11월까지는 오피스텔 구해서 나가도록 할게요..."  


그런데 을지로 주변에 오피스텔이 있었던가? 아니라면 어느 역 근처로 집을 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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