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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어린이의 도시체험학습

[양평 사람 최승선 052] 자존심은 상했지만, 재미는 있었다

by 최승선 Feb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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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도 못한 포인트에서 사람들이 웃는 경우가 있다. 옛날 얘기를 하다 보면 유독 그런 경우가 많은데, "도시체험학습"도 그중 한 포인트였다. "도시체험학습?ㅋㅋㅋㅋㅋㅋ 그게 뭐 하는 거얔ㅋㅋㅋㅋ"하며 웃는 친구들에게 "말 그대로.. 도시를 체험해.. 그게 다인데?"하고 의아해하며 답을 할 뿐이었다.


우리 학교는 6학년이 되면 도농체험학습을 했다. 도시의 학교와 자매결연 같은 걸 맺고, 도시 친구 집에서 하루를 자고, 농촌 친구 집에서 하루를 자는 활동이었다. 그 활동을 한 옆 학교 출신 친구에 의하면 일부러 농촌의 맛을 보여주려 메뚜기를 튀겨주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농촌 어린이는 처음 본 풍경에 질색했고, 용감한 도시 어린이는 시도했다나. 그건 내가 6학년이 되길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였다.


우리가 6학년이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도'농'체험학습은 '도시'체험학습이 됐다. 그게 뭐냐는 떽떽거리는 질문이 이어졌고, 다 같이 기차 타고 서울에 가서 지하철도 타고 문화재도 보고, 영화도 보여주고, 책도 사준다고 했다. 방학을 성남에서 지내던 나로서는 굉장히 가소롭고 유치한 활동이었지만 책도 사준다니 제법 기대가 되긴 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서울에 가는 건 처음이기도 했고.


오래된 기억은 조각조각 남아있다. 내릴 때 반납할 300원짜리 노란색 지하철 표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폴더폰에 꽂아놓던 친구, 그런 친구를 보며 자기는 슬라이드 폰을 써서 안 된다는 친구, 그런 친구를 보며 '난 꽂을 핸드폰도 없어'라고 말하던 나. 짜장면을 먹으러 지하 중국집으로 내려가던 계단. 교보문고에서 2권씩 책을 고르라던 선생님과 <그놈은 멋있었다 1,2>를 산 친구, 그 책을 기차에서 빌려 읽던 나.


그중 한 기억은 아주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지하보도로 걷고 있었는데, 웬 할머니가 우산을 쓰고 걷고 계셨다. 여기는 지하인데, 할머니는 아주 고상하게 옷을 차려입고 꼿꼿한 자세로 우산을 들고 걸어가셨다. 너무나 '서울 할머니'같은 모습의 그녀는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동시에 나와 친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 지하도의 모두가 할머니를 의식하고 있지만,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무슨 일이 날 것 같아 티 내지 않기 위해 숨죽였다.


"씨#, 미&$#@%$%#$#$##@%@@!!!" 곱상한 할머니는 우아하게 걸으며 소리 높여 쌍욕을 질러댔다. 그 소리는 마치 체육대회 총성 같았고, 지하보도의 어린이들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 마음이 모두 똑같아서 옆 친구에게 "우리 반 애들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거 처음인 것 같다. 그렇지?" 하며 웃었다. 그 말을 하던 나 역시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다.


지하도를 나오는 계단을 짧은 다리로 2칸씩 성큼성큼 뛰어 올라가,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속도로 달릴 때쯤 뒤에서 '여기서 길 건너야 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여기서 건너야 된대!" 몇 명의 소리로, 몇 명을 붙잡아 길을 건너 종로구 어딘가의 팔각정 아래 모였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아이들보다 덜 무서우셨던 건지, 뒤늦게 온 선생님은 아이들의 수를 셌다. 한 명이 부족했다.


당시 어린이들은 핸드폰이 없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우리 반 26명 중에 단 3명만이 핸드폰이 있었다. 전화, 문자만 되고 혹시나 인터넷에 들어가면 재빠르게 종료 버튼을 눌러야 했던 그 핸드폰. 없어진 아이는 핸드폰도 없었다. 애들한테 서울 구경이나 시켜주고 돌아가면 됐을 선생님은 미아를 만들 위기에 처해버렸다. 팔각정 아래에서 비를 피하던 아이들에게 절대 어디 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선생님은 핸드폰이 있는 친구 한 명과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러 갔다.


팔각정 아래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던 아이들은 지하도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 곱상한 할머니가 들고 있던 하얀 가방이 화두였다. "왜? 뭔데?" 하고 묻자, 그 할머니의 옆에 있었다던 아이가 사실은 그 하얀 게 가방이 아니라 강아지였다는 얘기를 했고, 또 다른 아이는 자기가 봤는데 죽은 개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뭐가 사실인지 중요하진 않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팔각정 아래 지루함을 덮을 콘텐츠가 필요했다. 물론 그 얘기를 한 친구들은 진심이었지만.


1시간이 더 지났을 때쯤, 모두가 모였다. 너무나 재빨랐던 탓에 건너야 할 곳에서 건너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뛰어가버렸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해리포터 마지막 시리즈를 볼 수 없게 됐다. 선생님이 전화로 양해를 구한 덕에, 트랜스포머 첫 번째 이야기를 보게 됐다. 기차 시간에 쫓겨 영화의 2/3 지점에서 30명 가까이 되는 관객이 우르르 나오는 민폐를 끼치는 것으로 여행을 끝났다. 서점은 언제 갔더라.


'도시체험'을 한 뒤로, '도시에서 사 온 책'은 한동안 교실에서의 주요 콘텐츠였다. 다 읽은 책을 돌려보는 시간, 가장 많은 대출을 발생시킨 작가는 단연 귀여니였다. 서로 무슨 책을 샀는지 물어보고, '네가 그 책을 샀어???' 놀라기도 하고, 그 책을 왜 골랐는지 묻기도 했고. 유익하기까지 했던 시간이었다. 그중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좋아할 책이 있진 않았겠지만.


이걸 생각하고 나면, '도시체험학습'을 비웃는 도시 놈들이 얼마나 생각이 짧은지 알 수 있다. 부모님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으면 시골 어린이들은 성인이 되어서야 지하철을 타게 된다. 지하철 노선도를 어디부터 해석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한다. 상영시간표를 보고 영화를 고르는 경험을 못 하기도 한다. 베스트셀러와 문제집만이 있는 서점을 다닌 어린이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책들이 놓인 서점을 다닌 어린이는 독서 세계의 이해가 달라진다. 


이 모든 경험을 누군가 한 번은 뚫어줘야 취향이 생기고, 동력이 생기는 법이거늘. 시골쥐들의 상경기라 생각하며 비웃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린다. 그렇지만 도시체험학습 얘기는 나도 매번 웃으며 하는 얘기이므로 시골쥐의 너른 마음으로 다시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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