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게는 잘못이 없고요
나의 첫 유럽은 이탈리아였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으니 열아홉 살 때였다. 누구에게나 첫 여행은 기억에 많이 남겠지만 유독 사건이 많았던 여행이었다. 경유지 연착, 짐 분실, 새벽의 불법 택시, 아픈 엄마, 놓칠 뻔 한 기차를 한 여행에서 겪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가겠다는 목표보다는 대학에 가면 유럽 여행을 가겠다,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들어가겠다는 목표로 수험기간을 견뎠다. 첫여름방학에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방학에 집중된 동아리 활동으로 장기간 여행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보내고 겨울방학엔 유럽 한을 풀어야만 했다. 기간은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이 시작되기 전 일주일. 행선지는 이탈리아로 정했다.
왜 이탈리아였느냐. 1학년 2학기 때 들었던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수업에 매료되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우피치 미술관의 카라바조를 꼭 실물로 보고 싶었다. 상당히 모범생스러운 이유가 아니었나 싶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탈리아는 첫 번째 유럽 여행지로 적절했던 것 같다. 유명한 관광지와 멋진 건물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유럽 뽕을 맞기에 딱이었다.
때는 한인민박이 유행하던 2009년. 여행사에서는 호텔팩이나 민박팩 같은 여행상품이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일정으로 1개 나라만 가는 상품은 없었다. 자유여행 경험이라곤 2박 3일간의 도쿄가 전부였기 때문에 비행기는 최저가를 찾고 찾아 모스크바를 경유하는 아에로플로트를 예매했고 로마 4박, 피렌체 2박, 베네치아 1박 일정으로 언니가 숙소를 예약해줬다. 악명 높은 항공사라는 것을, 그래서 저렴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탈리아 치안이 불안하다며 아빠는 나에게 엄마를 붙여줬지만 내가 아무리 어려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거의 안되고 패키지여행 경험만 많은 엄마는 솔직히 내게 챙겨야 하는 짐처럼 느껴졌다.
출발은 괜찮았다.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는 공동운항편인 대한항공을 탈 수 있었고, 옆 자리에는 매너 좋은 모스크바 주재원이라는 남자분이 앉았다. 물을 쏟았는데 마침 더웠는데 시원해 잘됐다고 말해준 그분에게 열아홉의 나는 큰 감동을 받았었다.
모스크바에 내리면서 불행은 시작됐다. 경유시간이 짧을수록 좋은 줄 알았던 나는 1시간 30분 안에 당연히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을 줄 알았다. 모스크바 공항은 무질서함 그 자체였다. 줄은 없고 직원들은 무관심했다. 본인 비행기를 놓친다며 새치기하는 사람들, 유모차에서 우는 아기들, 나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뒤섞인 두 시간 정도가 흘러 겨우 탑승구 앞으로 갔을 땐 다행히 우리 비행기도 연착되어 있었다.
연착되어 비행기를 놓치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원래 밤 10시 전에 로마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12시가 넘어 도착하게 되었다. 이제는 낯선 도시에 갈 때 되도록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도착하도록 여행 계획을 짜곤 하지만 대중교통이 없는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는 게 별로 좋지 않은 선택지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숙소가 호텔이었다면 몇 시에 도착하든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개인이 집에서 운영하는 민박이라 굉장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가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급한데 어라? 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짐을 찾아 나가고 레일이 멈췄다. 나는 크게 당황했고, 늦은 시간이라 공항에는 직원도 보이지 않았다. 청소하시는 분께 손짓 발짓으로 짐이 나오지 않았다며 설명하니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데스크에서 분실 신고를 했다. 으레 티켓 뒤에 붙여주는 가방 스티커를 이럴 때 쓰는 거구나...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멘탈로 밖으로 나오니 이미 시내까지 가는 기차는 없는 시간. 일단 숙소에 전화를 해야겠는데 문제는 환전한 돈이 모두 지폐라 동전이 없었다. 전화카드로 보이는 것을 자판기에서 구매했는데 먹통. 울고 싶었다. 겨우 동전을 빌려서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고 택시를 잡아야 했다. 택시? 택시는 계획에 없던 건데. 50 유로면 너무 큰돈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믿기지 않겠지만 유로 환율이 1700~1800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공항 안에서부터 우리 모녀를 찜해놓고 호객을 하던 한 아저씨를 따라갔는데 차가 택시가 아닌 일반 승용차인거다. 그때부터 두려움과 불안이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는 마피아의 나라가 아니던가. 동양에서 온 여자 둘을 이 아저씨가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구글맵 없이 가이드북에 의존해 여행하던 시절입니다). 잔뜩 경계한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던 시간이 지나고 창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한국에서 볼 수 없던 소나무와 돌바닥이 나오면서 로마의 올드타운으로 진입했다는 직감이 들었다. 뛰는 가슴이 두려움에서 설렘으로 바뀌고 얼마 뒤 갑자기 콜로세움이 나타났다!!
새벽 한 시 경의 조명이 켜진 콜로세움. 생각보다 정말 거대하고 멋져서 입이 떡 벌어졌다. 차 안에서 순식간에 지나갔으니 사진이 남아있을 리 만무한데, 13년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 장면이 나의 첫 유럽의 장면이 아닌가 싶다.
마피아의 일원이 아닐까 의심했던 기사 아저씨는 너무나 친절하게도 골목을 몇 바퀴씩 돌며 민박집이 있는 아파트를 찾아주었고, 민박집 사장님은 그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와 우리 모녀를 맞이해주었다. 짐이 올 때까지 속옷을 뒤집어 입고 모자를 사서 쓰고 수건을 빌려야 했지만 의외로 이틀 뒤 가방은 무사히 도착했다. 호텔 욕조에서 여독을 풀곤 했던 엄마는 스산한 유럽 날씨와 처음 써보는 도미토리와 겨우 두 발 딛고 설 수만 있는 조그마한 샤워실에 병이 나서 하루 쉬어갔지만 나는 비 오는 로마를 다 젖어 찌걱거리는 (가짜)어그부츠를 신고 발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겹쳐 곳곳이 문 닫은 피렌체에서는 할 게 없어 하루 종일 걸어 다니기만 했다. 피렌체의 민박집에서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계란이 들어간 된장국을 먹어야 했고, 베네치아의 민박집에서는 삶은 계란을 두 개 먹으려다가 혼이 났다. 까르보나라를 시켰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국수가 나왔고 왜인지 맛있는 피자 한 조각조차 쉽게 찾기 어려웠다. 50대였던 엄마가 이 눅눅하고 시린 여행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이 여행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때에만 할 수 있는 여행은 특별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망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 장면도 많고 망했기 때문에 그다음 여행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된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선명히 기억될 새벽의 콜로세움을 사진 대신 남겨보고자 아주 뒤늦은 기록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