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베이징
1월의 북경은 추웠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생애 아드레날린이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코트만으로도 북경의 추위가 견딜만했다. 사촌 오빠의 여자친구 본가에 신세를 지고, 우리 자매와 사촌 남매가 함께 다닌 다소 특이한 여행이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여러 장면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단지 기나긴 수험 기간을 보내고 첫 해외 자유여행이어서는 아닌 것 같다. 집 앞에 있는 식당이나 수레에서 아침을 사 먹었고, 마트 구경을 오래도록 하며 짧은 중국어로 볶음밥을 시켜봤고,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투어 상품으로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일주일이나 머물렀기에 자금성이나 이화원 같은 규모가 큰 관광지에서는 시간을 들여 구경하며 당시 유행이었던 점프샷 같은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다. 외국에서 지하철을 탄 것도, 버스를 탄 것도 처음이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태양궁공원역에 내려 623번 버스를 타면 집에 갈 수 있었다는 게, 버스를 타면 은은하게 중국 사람들의 체취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와 입으로 숨을 쉬던 게 기억난다. 비위도 약하고 위장이 약해서 생애 처음 훠궈를 먹고 급체를 하기도 하고 바뀐 환경에 밤새 화장실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위 아 시스터즈”
중국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한 나라는 아니었다. 동방항공을 타고 베이징공항에 금방 도착했다. 나는 그때 2000년, 즉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들었던 여권을 가지고 갔었는데 사진과 얼굴이 내가 봐도 많이 다르긴 했다. 입국 수속을 하는 직원은(군인복 같은 걸 입고 있어서 압박감이 더 심했다) 갸우뚱거리더니 계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가면서 보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판단이 안되는지 급기야 여러 명이 몰려와 내 얼굴과 사진을 관찰했는데, 이렇게 가만히 서있다가는 공안에 끌려가는 게 아닌가 싶어져서 언니를 가리키며 “위 아 시스터즈! 시밀러 시밀러!”라고 닮은 얼굴을 강력 어필해 보았다. 그제야 직원은 웃더니 통과시켜주었다. 얼마나 심장이 콩닥거렸는지 다소 시무룩해진 채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무단횡단의 달인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를 탔다. 잿빛 서울과 비슷하지만 다른 풍경들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전깃줄을 달고 거리를 누비는 전차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전차와 일반버스와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한데 섞여서 정신없게 조화로웠다. 특히 베이징 사람들은 좀처럼 신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횡단보도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어도 냅다 길을 건너는 능력이 대단했다. 쌩쌩 지나가는 차들 앞에 무력하게 서있기를 반복하다 며칠 지나니 우리도 어느 정도 로컬의 룰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의 음식들
탕후루, 군고구마, 계란부침(?), 아이스크림 튀김, 취두부, 요구르트, 또우장과 요우티아오… 지금 바로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만큼 많다. 처음 본 음식을 잘 시도하지 못하는 편이라 못 먹은 것들도 많지만(굳이 전갈 꼬치를 먹고 싶지는 않잖아요!) 거리에서 단돈 몇백 원에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다. 특히 아침에는 1000원 정도로 4인분의 아침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도입해야 하는 아주 훌륭한 문화가 아닌가! 탕후루는 이제 한국에서도 많이 보이는 과일꼬치인데 생각보다 시큼하고 달았다. 그 동그랗고 빨간 과일이 뭐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건 아침식사로 먹었던 또우장과 요우티아오다. 뜨끈하고 슴슴한 콩물에 적셔 먹는 꽈배기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아침부터 튀김을 먹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희한하게 자꾸 생각나는 맛이다. 가끔 호텔 조식에 이 두 가지가 보이면 베이징 숙소의 부엌 식탁을 떠올리며 챙겨 먹는다.
차원이 다른 크기
처음으로 간 곳은 역시 천안문과 자금성이었다. 중국 역사에 대해 잘 몰라서 우리나라의 경복궁 같은 곳이구나 하며 시작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엄청난 크기와 엄청나게 높은 자주색 담장에 압도되어 아 이건 경복궁이 아니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겠다, 무서운 말들을 하며 반나절 넘게 건물과 담장을 구경했다. 다음날 갔던 이화원은 또 어떤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호수를 손으로 파서 만들었다고? 그걸 파서 쌓은 게 저 뒤에 보이는 산이 된 거라고? 역시 대륙은 스케일이 남달라. 유적지에서 중국의 기세를 느껴버린 어린양이었다. 또 하나 신기했던 건 식당에서였는데 만두를 한 근, 두 근씩 우리나라에서 기본으로 공깃밥 먹듯이 시키는 것이었다. 만두야 뭐 싫어하는 사람 거의 없으니 한 근씩 시켜도 다 먹고는 했지만 만두에 단위가 붙는다는 게 작은 놀라움이었다.
만리장성의 모노레일과 옥 쇼핑
만리장성은 베이징에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서 국내 투어 상품을 이용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새벽에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당일치기 관광버스 같은 느낌이었다. 외국인 대상이 아니라서 가이드의 모든 설명은 중국어로 진행되었고 미니버스는 낡고 추웠다. 베이징보다 더 북쪽이어서인지 그날이 유독 기온이 낮았던 건지 만리장성은 정말 춥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와~~~ 대단해~~~ 근데 날아가겠다~~~ 소리만 지르다가 내려와야 했다. 내려올 때 모노레일을 탈 수 있었는데 모노레일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안전장치가 굉장히 허술한 놀이공원의 열차 같은 느낌이었고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당황스러움의 연속인 중국 여행. 돌아오는 길에 명 13릉에도 갔지만 너무나 추워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고 투어 상품에 빠질 수 없는 쇼핑도 해야 했다. 품목은 바로 옥! 무척 넓은 옥 전시장을 둘러보고 머쓱하게 다시 버스에 탔던 어린양이었다.
그래도 베이징은 도시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이라 여러 방면으로 경험치가 많이 부족했던 나는 베이징이 꽤 세련된 도시라고 느꼈다. 올림픽을 갓 치른 터라 지하철이나 쇼핑몰 같은 곳은 한국보다 더 깨끗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느라 문화 공간 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798 예술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는 내 자신이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칭화대에서는 나의 곧 다가올 대학생활을 상상하기도 하고 후통에서는 잘 몰라도 차와 다기 구경을 실컷 했다. 무역 센터 같은 곳에 가면 로컬푸드에 비하면 비싸지만 원하는 음식은 다 찾을 수 있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스펀지처럼 이것저것 흡수하며 우리나라보다 한참 뒤처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준 여행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파견 갈 수 있는 도시가 워싱턴과 베이징인데 베이징은 모두 꺼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왜? 난 베이징 좋은데? 하며 달려드는 것도 이런 기억 때문일 것이다.
2박 3일, 3박 4일 정도로 가는 베이징을 꽤 오랜 시간 구석구석 둘러봐서인지 나는 중국 여행에 늘 관심이 있었다. 관심이 있던 것에 비해 그다음 칭다오(청도) 방문은 2019년으로 10년이나 지나서였지만 비자 받는 것이 상당히 걸림돌이 되었던 것으로 해두자. 오영욱의 ‘중국인은 왜 시끄러운가’를 보면 중국의 다른 소도시들도 가보고 싶어진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청두에 가보려고 책까지 사두었는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당분간 판다를 보고 마파두부를 먹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서 조금은 속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