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오사카, 교토, 고베
언니와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비행기를 탔다. 어린 시절부터 용돈을 받으면 받는 족족 쓰는 언니였고, 받는 대로 아껴 모아두는 나였는데 호텔에서 자자는 언니의 꼬드김에 내 과외비를 털어야 했다. 두 명 몸을 겨우 구겨 넣을 수 있는 비즈니스 호텔이긴 했지만 나중에 더 좋은 데서 자게 해주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각서는 어디로 갔을까? 나보다 여행 경험이 더 많았던 언니는 아침부터 밤까지 꽉 채워 멍때리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나는 매일 밤 지치고 발이 아파서 울상이었다. 그렇지만 덕분에 혼자 도쿄를 헤맬 때는 알 수 없었던, 일본 여행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하는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다.
수국, 간사이 패스 그리고 전망대
우리는 오사카에 숙소를 잡고 교토와 고베를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간사이 패스라는 것을 한국에서 미리 구매했던 것 같다. 덕분에 매우 고된 일정을 소화해야 했는데 일단 첫째 날엔 오사카에 왔으니 오사카 성에 먼저 갔다. 하늘색 지붕의 오사카 성을 구경했는데 우리가 사진을 엄청 많이 찍는 걸 보더니 수위 아저씨가 사진 스폿을 알려주었다. 넓은 잔디밭에 앉아 찍기도 하고 6월 제철 맞은 수국 옆에서도 사진을 수십 장 찍었다. 나는 이때까지 수국이라는 꽃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새파랗기도 하고 분홍빛이 나기도 하고 보라색이기도 한 이 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때 시작된 수국 사랑이 이어져 몇 년이 지나 대학 졸업식 꽃다발을 수국으로 요청하기도 하고, 제주 수국길에서 웨딩사진을 찍기도 했다.
간사이 패스는 교통권과 여러 관광지의 입장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패스의 뽕을 뽑겠다고 자매님은 각종 전망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높은 곳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우메다 공중정원, 햅파이브 대관람차, 그리고 바닷가 근처의 어느 높은 빌딩에도 올라갔던 것 같은데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우메다 공중정원은 건물 가운데로 뻗어있는 에스컬레이터가 멋지긴 했다. 납작한 플랫슈즈를 신고 체감상 3만 보 정도를 걸었는데 그다음 날엔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서 또 3만 보 정도를 걸어 다녔다. 그때는 해리 포터가 생기기 전이긴 했지만 에버랜드와는 다른 느낌에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오사카에서는 음식도 무척 맛있게 먹었다. 도톤보리에서 사 먹은 돈코츠 라멘, 오코노미야키에 감동했고 특히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의 베이커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켜켜이 쌓인 녹차 케이크를 한입 가득 먹고 너무 맛있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당시 유행이던 바움쿠헨이 만들어지는 모습 같은 게 아직도 생생하다. 무엇을 먹든 크게 맛있는 것도 없고 호들갑도 떨지 않게 된 30대의 나는 오감으로 처음 보는 맛들을 느끼던 과거의 내가 부럽다.
햇살보다 비
나의 교토사랑 역사가 시작된 날은 흐리고 비가 내렸다. 가이드북에 나온 대로 금각사, 은각사와 철학자의 길, 청수사, 기온 거리를 착실하게 돌아다녔을 뿐인데 이 오래된 도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가모강 따라 늘어선 식당들과 골목골목 오래된 2층 가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풍경이 신기했다. 일본식의 모래 정원이 있는 은각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죽이게 되었고 금각사의 화려함과 청수사의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두루 좋았다 (스무 살 때부터 취향 확실했다). 굵어지는 빗줄기를 뚫고 철학자의 길을 걸어 찾아간 식당에서 먹은 김이 폴폴 나는 카레우동도 무척 맛있었다. 여긴 무조건 다시 와야겠다고 좋은 기억을 품고 5년 뒤 마음이 힘들 때 혼자, 그 다음 해에 애인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계속 다시 찾아가는 도시가 되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카페들과 줄 서야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가득한 곳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맛과 멋이 또 있어서 요즘에도 뜬금없이 스마트커피의 프렌치토스트나 오하라의 고요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리마 온센으로 향하는 숲속 전철
고베에 간 목적은 온천이었다. 아리마 온천마을은 시내에서 전철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장점이었다. 아마 료칸도 있고 아담한 온천들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선택한 곳은 우리나라 대형 찜질방처럼 규모가 대단했다. 셀 수 없이 많은 탕에 들어가고 찜질복을 입고 따뜻하게 몸을 지지고 나오니 괜히 피부가 하얘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곤해진 몸으로 녹색 나무 사이로 달리는 단선 열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시내로 나왔다.
나 고베에 가봤어! 고베에 대해 좀 알아!라고 하기엔 아는 것도, 기억나는 것도 너무 적지만 고베는 오사카, 교토와는 또 느낌이 다른 곳이었다. 바다와 온천이 있는 도시라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여유 있게 느껴졌고 지진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존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좋아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무 정보 없이 들어간 베이커리에서 사 먹은 빵도 맛있었고, 어느 백화점에서 고디바 아이스 초코 음료를 먹고 눈이 번쩍. 일본이 디저트 강국이라는 신념이 생기게 한 곳이다.
돌이켜보니 이 여행 참 알찼다. 하루하루 꽉 차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지금은 한 도시에 진득하게 머무는 여행을 선호하지만 또 이런 바쁜 여행의 묘미가 있다. 이때 가보지 않았으면 아마 고베에는 영영 갈 일이 없지 않았을까? 자꾸 나 때는~하며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가이드북과 인터넷 서칭에 의존해 여행하던 시절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너무 많은 정보에 조바심이 나고 가끔은 멀미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식당 평점이 어떤지, 내가 지금 서있는 곳이 지도 정확히 어딘지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하는 여행을 다시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