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규슈 패키지여행
나의 외할머니 최경순 여사는 1921년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태어나 평생을 구례에서 살았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동네의 미남과 결혼해 자녀 아홉을 낳았는데 그중 둘은 아기 때 죽었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기에 태어나 6.25전쟁, 여순반란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를 몸으로 겪어내고 현재 한국 나이 102세가 되었다. 50대 초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혼자 산 세월이 더 김에도 다시 태어나면 혹은 저세상에 가면 남편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할머니가 마흔에 낳은 막내딸의 막내딸로 22명의 손주들 중 막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 뱃속엔 딸내미가 크고 있으니 다음 주, 혹은 다다음 주에 아기가 태어나면 할머니는 막내 손녀의 딸까지 본 셈이 된다(사실 이미 고손도 있다). 나는 할머니와 딱 일흔 살 차이가 나는데 내가 태어날 때 이미 쪼글쪼글한 할머니였던 할머니는 여전히 할머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고 몸집이 무척 작아지긴 했어도 정신이 온전하고 혼자 거동하고 식사가 가능하시니 놀라운 일이다. 6년 전 한번 할머니가 곧 돌아가실 수도 있겠다고 와닿은 일이 있었는데 늘 그대로 계실 것만 같은 할머니였기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회복하시어 지금까지 잘 살아계시니 다행인 일이지만 할머니는 늘 "이제 죽고 잡다"라며 늘 마지막인 것처럼 인사를 하신다.
2011년 2월, 오랜만에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2003년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꽤 오랜만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하룻밤을 자면 다음날 아침 규슈에 도착하는 패키지 상품으로 할머니까지 함께 모셔가기로 했다. 91세였던 할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고 외국 땅을 밟아보셨다. 91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할머니는 일행을 꽤 잘 따라다니셨다. 일본이라 끼니마다 쌀밥이 나왔으나 끼니마다 "에- 맛대가리도 없다"라고 한마디씩 꼭 하셨는데 끼니마다 깻잎 통조림, 장조림 통조림 따위를 꺼내드려야만 했다.
대형버스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내리고 타고를 반복하는 패키지여행은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파악이 잘 안되고 그러다 보니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후쿠오카, 벳푸, 유후인에 갔던 것 같은데 사진으로 남아 있는 단편적인 장면들만 기억에 남는다. 이때 이후로는 후쿠오카에 가본 적이 없어서 더 흐릿한 것 같다. 패키지여행 코스가 대부분 비슷할 것 같은데 온천이 펄펄 끓는 가마솥 지옥, 활화산인 아소산, 유후인의 긴린코, 학업의 신이 있다는 다자이후텐만구 사원, 후쿠오카 성에 간 기억이 난다. 유후인에 갔던 날 날씨가 무척 맑았는데, 벌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책하던 것이 가장 좋았다. 신기하게도 페리 안에도 대욕장이 있었고 외곽에 자리 잡은 숙소마다 온천이 있어서 매일 할머니, 엄마, 언니와 함께 목욕하던 경험은 이제 와 돌이켜보면 다시 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는 이 여행이 어떠셨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사진을 인화해 드렸는데 좋아하셨던 걸 보면 괜찮은 기억이지 않았으려나. 그저 고되고 힘들기만 하지는 않았길 바랄 뿐이다. 아들 옆에서 죽고 싶다던 고집은 몇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단념하시고 지금은 평생 고향 구례를 떠나 막내딸 집에 계신다. 나보고도 아들 하나 더 놓으라고 말씀하시지만 똑같은 말 하고 또 해도 할머니가 오래 더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