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내가 선택하며 산다?
나와 청춘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
제길! 인터넷이 안 된다! 어찌하나?!
인터넷에 중독된 스스로에게 던지는 주관적인 질문과 답.
큰일이다. 연락 올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 해야 할 일이 산적한데. 인터넷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사실이다.
인터넷이 안 되는 건 사실이지만,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절망적일 필요가 없다. 뉴스건 뭐건 사실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 단지 사실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인류 종말의 날에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의지도 우리는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종말도 의미론적으론 별거 아닌 거다.
어쩌면, 기회다!!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에서, 무언가 뿜어내고 기획할 기회가 온 것이기 때문이다. 반 의도적이지만, 소위 얘기하는 사회관계망(SNS)을 벗어난 것이다.
SNS 시대의 도래가 개인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고 맹신하는 것은,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정보의 격차는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SNS를 이용하면 인간관계가 개선되고 행복해지는가? 이미 우리는 그렇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다. 또한, 현대 지성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집단지성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집단지성을 통한 결과물이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의 고전적 통찰과 지식보다 나은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늘은 늘 존재한다.
인간이라는 뜻이 사림인 사회적 동물이라는 뜻을 일부 반영하지만, 인간은 온전하고 완전한 결정체이다. 사회에 의존하고 권력에 의존하고 시스템에 의해 살아가는 부속품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 시대의 도래는 급격하게 인간사회의 변동을 이루어냈지만, 그 또한 인간사의 한 영역일 뿐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인간은 늘 외롭다. 어쩌면 변할지도 모르지만, 그 변화의 속도는 매우 느리다.
기술과 지식의 이해보다 인문의 바탕이 중요해 지는 시기가 곧 올 것이다. 뉴욕도시의 태생 아이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변방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운 아이가 가진 생존본능과 사회적 본능이 중요한 시대가 곧 돌아올 것이다. 이미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부 식자들이 그들의 자녀와 함께 긴 여정의 여행을 떠나거나, 귀농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직감에 가까운 지식경험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문학적 무장이 없이는 현대사회와 이래사회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혹은 확신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나 또한 현실이 제공하는 정보를 쫒아서는 우리 아이의 행복한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현대 사회의 발전 속도는 이미 기술이나 직업을 준비하는 기능적 사회 유지 기능은 상실되었다. 예컨대, 아무리 좋은 대학의 좋은 과를 가도 평생을 그 기술로 20년 이상 살 수 있는 나라와 직종은 많지 않다. 십년 이상을 과학이나 법 과학을 공부 한다고 해도, 전공의나 법관이 되기는 힘들고, 된다 한들 곧 그들의 판단과 기술은 기계에 의해 의심받게 될 것이다.
그럼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노동을 해야 하고, 궁금함을 못 이겨 탐구해야하고, 희망해야하는 인간은 무엇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떤 본성을 따르고, 무엇을 버려야 우리는 행복해 질 것인가?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다.
답은 인간의 본성에 있다.
확답은 모르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혹은 사회미디어의 해석, 포장, 및 변형보다는, 자연스런 수준의 인간 본성에 대한 수용을 주장하고자 한다. 나에게 중요한 인간 본성과 타인들의 중요요소는 다름을 인정해야 편안해진다.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인터넷과 SNS 는 ‘관계성’이라는 인간 본성을 자극하지만, 자연스럽진 않다. 인간은 원래 고독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결합, 가족, 세대, 사회 계층, 사회계약, 신분, 종교, 기술, 경제, 정치, SNS 등은 인간이 살기위한 과정과 수단이지, 이를 위해 인간과 인간성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발전을 위한 인간성의 희생은 더더욱 옳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회는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여 왔다. 생존과 이념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였고, 작금에도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 하고 있다. 그렇다면 SNS 는 우리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하고, 어떤 혜택을 주는가? 대게 역사적으로 보면, 그 시대의 가치는 미래의 희망이나 다수의 의견을 전제로 일부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선택해왔다.
이른바 네트워크 시대와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소중히 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어차피 주관적인 이야기니, 개인적인 이야기를 추가해본다. 본인은 최초보다 최후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성향은 숱하게 현실에서 다양한 형태로 실행되었다. 퇴임을 앞둔 지도교수님을 따른다거나, 누군가에게 처음이 되기보다는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 등. 그래서 대부분의 모임에 항상 막내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적, 사회적 성향이 보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사회적 요소를 볼 때, 난 그저 ‘올드’할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세운 기준과 행동양식이 있어야 한다. 거창하겐 철학, 즉, 자신만의 경험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선택과 행동의 근거는 행동과학적으로 매우 다양하지만, 변치 않는 철학과 긍정적 학습, 그리고 가치, 신념, 태도 등이 있어야 외적요인에 영향을 적게 받는다.
청춘들에게 질문하나를 던져 본다.
결혼. 할 것인가? 아이. 가질 것인가?
어떤 답을 했건, 결심을 했건 본인의 선택이다. 다만, 가능하면 뉴스나 SNS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사유하거나 본능에 충실하길 바란다.
사회적 기준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고, 마치 인간의 본성이 변한 것 같이 포장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혼율의 증가와 출산율의 상관관계를 보자. 이혼과 출산은 상관성이 있어 보인다. 최근 이혼율의 증가가 큰 폭으로 확대되었고, 인구의 감소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선행을 보면 아마 출생률의 감소가 먼저일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조절정책이 이혼을 초래하였는가? 아니다. 하지만 개연성을 전제로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 지식인과 미디어의 행태이다.
3포 세대, 5포 세대, 7포 세대... 직면한 이 문제가 경제 문제때문이고 단정 지어지고 있다. 단지, 돈이 없어 인간답게 살수 없다는 전제는 옳지 않다. 해결책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어떠한 전제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할 것인가?
한 명의 연구자로써 짐작컨대, 원천적, 핵심적, 직접적인 사회변화의 원인을 찾아내야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늘 그렇듯 대부분의 원인과 해답은 반드시 내 안에 있다. 아니 내 안에서 찾아봐야 한다.
우리는 내부의 문제인식을 통해 해답을 찾는데 익숙하지 않다. 타인에 의해, 특히 미디어에 의해 투영된 왜곡된 자기를 추구하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잘생김의 기준, 그리고 잘 삶의 기준은 온전히 내 것이어야 하는데, SNS와 미디어에 의해 그 기준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옳지 않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둘러 볼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삶, 어떤 행복, 어떤 관계를 맺을지 선택하여야 한다.
담배도 술도 나쁜 인연도 한 달만 끊어보면 부질없음을 안다. 사회 기준도 마찬가지다. 담배 빼곤 정작 나도 못하지만...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고, 자기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내 인생 내가 선택하면 산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선택과 의지 되로 안 되면, 그건 운명이고 숙명이다. 받아 들여야 한다.
사회 속에서 자신을 질책하고, 타인을 선망하거나 욕하는 것보다는, 혼자서 나만의 공간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또는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 젊은 친구들의 본성이 다양하게 발휘되길 기대하며 글을 올려본다.
먼 곳이 와 있는 가족의 애처로움을 자위하는 글에, 그대들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끌여들어 미안하다.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