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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닝룸 Dec 22. 2020

넷플릭스 드라마 리뷰 <인간수업>

사회라는 정글 속 어린 포식자들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수업> 결말과 리뷰
비도덕적인 것을 못 참는 사람은 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 어쨌거나 성매매로 돈을 벌려는 녀석들의 편에 서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리뷰에서 인물들을 선과 악의 잣대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설령 악이라고 해도 상대적으로 더 악한 그림자 앞에서 이 어린 핏덩이들은 잠시 선해 보이기도 한다. 마치 강한 자가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어린 포식자가 나이 든 하이에나에게 사냥 당하는 장면 같다. 다만 내가 봤을 때 이 드라마는 범죄 예방의 성격을 띈 것은 절대 아니며, 사회의 어둠을 보여주면서 공감을 강요하는 내용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실컷 범죄를 보여줘 놓고 마지막에 나오는 '주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연락 주세요.' 라는 멘트는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드라마가 처음 다루는 것은 성매매이다. 하지만 최종화로 갈 수록 경찰, 조폭, 일진들의 개입으로 성매매에서 초점은 멀어지는 듯하고 각자의 분노와 신념이 뒤엉켜 폭력으로 물들게 된다. 정말 이렇게까지 폭력적으로 연출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창피해서 그런다." 라고 말하는 이실장이라는 캐릭터는 이 드라마와 부조화스러운 구석이 있다. 혼자서만 흔들리지 않고 완고한 인물이다. 또한 스토리와 감성 자극을 위해 희생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서 'n번방 사건'이 연상된다는 코멘트를 많이 봐서 난 또 강제적으로 성을 착취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삼촌인 오지수가 운영하는 어플의 '고객님'들은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다. 삼촌이 연락불통 되자 다른 스폰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도 한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해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림자, 어느 후미진 골목마다 있는 '○○노래클럽 - 여자 항시 대기' 같은 간판은 콕 찝어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준다. 이런 성매매에 대한 불쾌감은 애정이 있는 성관계와 매춘을 통한 성관계는 그 가치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매춘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많은 금액을 준다 해도 성을 팔지 않을 것이다. 후자는 존중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성행위 후 돈을 받는다면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성의 고귀함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음에 있다는 생각은 좋아하지 않는다. 출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빽빽인 현대에 그런 이유로 성을 고귀하게 대접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보다는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서로의 성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하는, 보이지 않는 약속이 성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본다. 사귀기로 한 사이면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는 것과 같달까. 성에 대한 존중은 한 인간에 대한 존중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매춘은 존중을 배제함으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과 똑같은 행위를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어둠의 거래가 존재하는 것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성의 가치가 훼손된 것 같은 불쾌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성매매 자체를 부정하고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보상의 대가로 성을 지불하는 것은 인간 뿐 아니라 여러 동물종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성매매의 존재에서 장점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항상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은 어떻게든 좋게 포장하려 해도 결국 밝은 사회로 나올 수 없는 치부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을 파는 것은 존엄성을 파는 것과 같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인식에서부터 나온다. 물론 개인은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기준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이상 성매매가 성의 가치를 훼손하는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은 각자 개인의 가치관에 맡겨 놓는다.




추락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오지수를 보여주는 여러 감각적인 씬들 속에서 '그래서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은 뭔가' 싶었다. 오지수처럼 되기 싫으면 이런 범죄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 것인지,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고 제대로 덤비라는 것인지. 나는 후자의 메세지를 강하게 받았다. 요즘 웹툰이나 드라마에서는 학교 내에서 권력을 가진 일진을 주인공으로 많이 다룬다. 작품들 속 일진에 대한 엄청난 미화에서 느껴지는 교훈은 당하기 싫으면 강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위험한 교훈은 약하니까 당하는 것이라는 잔인한 결론으로 우리를 끌고갈 수 있다. 오지수를 괴롭히는 조폭과 싸우는 일진들은 피해자가 자살할 생각을 가질 정도로 집요하게 괴롭히기도 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일진에게 괴롭힘 당하는 피해자들은 밟았을 때 꿈틀거리지도 못하는 한심한 녀석들처럼 보여진다. 이것은 학교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도 어물쩍 떠넘기는 간사한 눈속임이며 비정한 사회에서 썩은 새싹들이 자라날 수 밖에 없는 원리이다.

누구도 사냥 당하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강자에게 언제든 사냥 당할 수 있는 이 잔인하고 위험천만한 사회에서 살아 남으려면 각자 날카로운 발톱 하나쯤은 숨기고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사실은 초식동물일지라도 말이다. <인간수업> 속 오지수라는 캐릭터는 여자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찌질한 남자아이다. 하지만 그 여자의 포주이기도 하며, 범죄의 지능적 수장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는 나이와 범죄의 질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필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우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도 포주가 될 수 있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싶었던 고등학생은 성매매 어플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 판이 커지자 결국 더 강한 어른들에게 잡아먹힐 뻔 한다.

드라마의 활짝 열린 결말이 아쉽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소라게이다. 껍질 속에 숨어 있다가 안전할 때 모습을 드러내는. 포식자로부터 안전하려면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또 다른 포식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이에나들로부터 도망치며, 우리보다 약한 존재를 찾아 해매는 포식자 말이다. 사회라는 정글에서 동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칠 수 있는 독기는 경쟁력으로까지 비춰진다. 그저 보다 이기적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잔인한 이 정글의 승리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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