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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닝룸 Nov 08. 2020

<1984>_조지 오웰

파놉티콘의 눈


<1984> 출판 도서에는 '눈'이 그려진 표지가 많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의 모습, 즉 개인에게 공포를 조장하여 기어이 항복하게 만드는 모습은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는 '눈'과 의미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잘 어울린다. 이 눈은 파놉티콘 감옥을 떠올리게 한다. 파놉티콘은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 경에 고안한 건축물이다. 감방들로 이루어진 이 원형 건물 안에서는 모든 죄수가 중앙 감시탑으로부터 감시당한다. <1984>의 사회 속 당원들은 모두 파놉티콘 속의 죄수이다.

냄새나고 비좁은 승리 멘션에는 각자의 방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주인공 윈스턴은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평범한 남성이다. 그는 기록부에서 당이 발표하는 내용에 따라 글을 수정하고, 과거의 글은 기억 구멍 속에 집어넣어 태워버리는 일을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윈스턴은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빈민가의 고물가게에서 몰래 구입한 소중한 공책에 작고 서툰 필체로 그날의 날짜를 적는다. <1984년 4월 4일>. 그는 이것이 실제 날짜인지 확인할 수 없다. <1984> 속에서 모든 진실은 왜곡되어 있다. 당에서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며 동아시아와 전쟁 중이라고 발표하면 모든 언론이 그에 맞춰 즉각 역사를 수정한다. 이러한 세상을 윈스턴은 명확하게 표현한다. <과거는 죽었고, 미래는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세계관 속에서 개인은 사회가 주입하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이다.

그러나 진실을 담은 문서를 발견하고부터 윈스턴의 마음속에서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는 모두가 전체주의라는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뜨인 눈으로 똑똑히 바라본다. 그리고 줄리아와 사랑하면서부터 자유를 위한 저항을 꿈꾸기 시작한다. 사실 윈스턴은 처음에는 줄리아를 증오했다. 소설 속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이제야 윈스턴은 자기가 왜 그 여자를 증오하는지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젊고 예쁜데 섹스에 무관심해서 죽도록 미웠던 것이다. 윈스턴은 그 여자와 자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혐오로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는 반대로 <1984> 속 정부는 성행위, 특히 사랑을 금지한다. 그럼으로써 개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연대감을 허물어뜨려 마침내는 서로를 혐오하여 고발하기 용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외람될 수 있지만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관계에 무관심해지면서 우리가 서로를 혐오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물가게에 얻은 허름한 보금자리에서 윈스턴은 잠든 줄리아 곁에서 골드스타인의 책을 읽는다. 그는 무산계급 노동자의 인간성에 희망을 품는다. <미래는 노동자들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로 살아가듯이 네가 만약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이 넷이 된다는 비밀의 원칙을 전한다면, 너도 그 미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많은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투쟁한다면! 그렇다면 윈스턴이 보금자리를 얻은 것처럼 자유를 쟁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국 윈스턴과 줄리아는 그들이 각오한 대로 사상경찰에게 체포되고 만다.

윈스턴은 소설 초반부부터 오브라이언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 오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역시 자신처럼 눈을 뜨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사상경찰에게 붙잡혀간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에게 고문당하며 의식을 개조당한다. 오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사상뿐이란 말일세. 우리는 단순히 적을 말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개조시키고 있네." 독자들은 윈스턴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을 읽어나가면서도 아마 희망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할 것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숭고한 의지가 있다면 어떤 고통이든지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이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쥐가 있는 101호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결국 윈스턴은 소리친다. "줄리아한테 하세요! 줄리아한테요! 제게 하지 말고 줄리아한테 하라고요!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요. 살갗을 벗겨 뼈를 발라내도 말이에요. 저는 안 돼요! 줄리아한테 하세요! 저 말고요!"

며칠 전 영화 <패왕별희>를 보았다. 93년도에 제작된 영화이지만 왜 아직까지도 유명한지 알 만했다. 장국영의 명연기는 말할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중국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였다. 중국이 공산주의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데려다 키운 두지를 배신한 샤쓰이, 그리고 평생을 죽마고우로 지냈던 친구와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배반하게 되는 시투의 모습을 보고 바로 <1984>가 떠올랐다. 두려움에 질린 시투의 입에서는 자신의 삶 그 자체였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말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은 바로 이성과 지성의 항복이었다. 죽음과 공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꼴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그 먹먹한 장면은 <1984> 속에서 "줄리아에게 하세요!"라고 절규하며 마침내 비장했던 정신의 백기를 던지는 윈스턴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공포란 이런 것이다. 고고한 척하던 실존적 인간도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한낱 짐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냉정하게 보여주고야 마는 것이다. 사상을 개조당하고 풀려난 윈스턴은 시간이 지나 줄리아와 마주친다. 그러나 둘 사이에 분명히 존재했던 무엇인가는 영원히 죽어버렸고, 타버렸고, 마비돼버렸다. 마침내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라고 말하며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책을 총 세 번이나 읽었으니 이것으로부터 내면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거쳐보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그저 나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한낱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내가 윈스턴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같은 가장 단순한 질문부터 던져볼 수 있다. 진실을 알고서 저항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질문만큼 쉽게 결정 내리기 어렵다. 그것은 목숨과 어쩌면 그보다도 중요한 자신의 이성을 걸어야만 하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싸움터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도 윈스턴처럼 했을 것이다. 나에게는 뻔히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척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머릿속에서 솟아나는 지성을 지워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통 속에 몸을 던져버리는 것이 더 수월하다.

그러나 윈스턴은 결국 패배했다. 윈스턴은 저항할 의지가 있었지만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무지는 힘' 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대중을 무지한 자로 개조해버리는 <1984> 속 세계관에서 과연 어떤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 무시무시한 파놉티콘 속에서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프롤레타이아들이 무지에 빠져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또한 자신들이 가진 엄청난 힘에 대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면 이 얼마나 암담한가. 하지만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지성 속에서는 반항심이 꿈틀대기 마련이며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꼴이더라도 투쟁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용기 있는 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저항이라고 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혁명은 갑자기 운 좋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을 각오한 수많은 투쟁자들의 희생이 이어진다면 결국 언젠가 마지막 계란을 던졌을 때 바위는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것이다.

나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인류애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단지 항상 감시당해야 하고,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에 사는 것을 거부한다.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보다 어렵다. 내가 살고 싶은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바로 내가 원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감시에 질식하는 것보다는 자유에 질식하는 것을 택하겠다. 나는 언제든 나의 기쁨과 고통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개인은 전체주의 속 하나의 부품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실존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통제로 무지해져야 할 의무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하나하나 정의시키고 그것을 현 사회와 비교하는 과정을 거치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1984>에서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방법은 무지와 가난이었다. '무지는 힘'이라는 사상을 그토록 집요하게 주입시킨 것을 보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이 지식을 얻는 것인 셈이다. 그러니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방대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우리가 올바른 통찰력을 가지고 이 지식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무언가를 변화시킬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 더하기 둘이 넷이 된다는 비밀의 원칙을 전한다면, 우리도 미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시대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1984> 속 당원들처럼 눈을 가릴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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