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이야기 #1
여름 방학을 맞아 침대와 한 몸이 된 저는, 조카님께서 냉동실에 얼린 바나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생바나나가 드시고 싶다, 하셔서 터덜터덜 집 근처 과일가게로 향했습니다. 멍-하니 계산을 기다리던 중, 누군가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평화로운 방학에 적응해 퍼져있던 저의 멘탈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의사들, 다 나쁜새끼들이야
과일 가게를 사랑방삼아 담소를 나누시던 아주머니들 중 한 분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그렇게 나쁜 의사들을 만나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암이 퍼진 걸 왜 몰랐대? 왜 미리 말 안해줬다든?"
"그러게나 말이야. 피검사만 해도 나오는 걸! 그 암센터 의사들, 다 나쁜 새끼들이야."
"어쩌면 좋아..."
아주머니 지인 중 누군가가 암센터에서 전이암을 진단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런데(아마도 추측하건데), 원발암 진단 시 전이암은 확인되지 않았고, 이후 검사에서 전이가 확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병원, 어느 암센터인지 모르겠지만 환자를 보살피며, 진단과 치료에 최선을 다했을 의료진은 암의 전이를 뒤늦게 확인했다는 이유로 아주머니께 "나쁜 새끼들"이 되었습니다. 그간 어떤 일이 있으셨길래, 무엇이 아주머니들로 하여금 이토록 의료진에게 적개심을 가지도록 한 것일까요?
그럼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요즘 '라이프'라는 의학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보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병원의 영리화를 위해 거대 그룹이 대학 재단을 인수하면서 소위 '빅5'로 불리는 병원 중 한 곳인 '상국대학교병원'에 새로 사장이 취임하는데, 이 사장을 대표로 하는 거대 그룹과 의사들의 갈등관계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속에서, 새로 선임된 사장이 만년 적자과인 응급, 소아, 산부인과를 지방으로 파견을 보내겠다는 공지를 하자 의료진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갑자기 등장한 사장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합니다.
사장 曰: 자, 존경하는 상국대학 의료진 여러분. 그동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습니까? 아니, 서울 사람의 두 배가 넘는 엄마들이 수도권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산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데, 여러분들 의사이지 않습니까. 간호사잖아요. 여러분들이 가면 그 사람들 안죽는거 아닙니까? 여기가 회사였다면 말이죠, 회사에서 일부 사업팀을 지방으로 이전하기로 했다면, 다같이 모여서 '서울팀 없어지냐, 왜 우리만 가야되냐' 이러고 있을 것 같습니까? 천만에. 벌써 지방 현지가서 자기들 살 집 구하고 있습니다.
의사 曰: 우리가 일반 회사원하고 같습니까?
사장 曰: 그럼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원과 의사는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극 중 사장의 말처럼, 한명의 직장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조금 달라'보이는' 양성과정과 생활로 인해 뭔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벽을 쌓아올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개업의가 아니라면 월급받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리의 안정성에 대한 불안도 있고, 항상 피로하며 휴식에 목마르다는 점도 같습니다. 모두 투표권은 하나이며, 모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에게만 유달리 요구되는 희생정신과 의무, 책임감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다른 듯 하면서도 같아보이는 두 집단. 무엇이, 어떤 차이점이 회사원과 달리 의사에게 요구되는 가치들을 부여하는 것일까요.
예전 영화 '스파이더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속으로 했던 말입니다. 어릴 적, 영화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마음 속에 남았던 대사 입니다. 얼마 전 의전원장님께서 '흰 가운'의 의미를 강조하신 강연을 하셨습니다.
흰 가운은 의사로 하여금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 흰 가운을 입고 있는지, 그에 걸맞는 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해야 한다.
못하겠으면, 자격이 안되면, 가운 입지 마라.
저는 의사가 아니라, 이제 막 의학도의 길에 들어선 학생입니다. 제가 걸음마는 시작한건지 조차 모를 만큼 햇병아리입니다. 그래서 대중의 시각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포털 기사의 댓글과 같은 대중매체에서, 그리고 집 앞 과일 가게 아주머니들의 대화와 같은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사회가 생각하는 부정적인 의사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다음과 같은 단어를 키워드로 하고 있네요.
특권의식, 이기성, 폐쇄성
모두가 바라는 것은 '흰 가운'에 걸맞는 모습을 갖춘 그런 의사가 아닐까, 합니다. 학교에서도 이를 위해 다양한 교육을 하고 있고, 저를 포함한 학생들 또한 스스로 고민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찰의 노력을, 고민을 계속해 나간다면, '흰 가운'을 입을 자격을 가진 의사가 되어 집 앞 과일가게 아주머니들의 의사에 대한 인식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