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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N Jul 11. 2017

쏴아아-

feat. 내리는 빗물처럼 흘러가는 것

 연일 내리는 빗줄기에, 말라붙었던 땅이 촉촉하게 젖어들었습니다. 빨래도 잘 안마르고, 잠시나마 비가 그치는 순간에는 한증막같은 답답함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시원시원한 빗소리는 반갑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비, 그리고 그렇게 내린 비가 땅을 적시다 못해 넘쳐흘러 물줄기를 만들고 어딘가로 떠나가는 것을 바라봅니다.




너 믿고 나 잔다.


 하상욱 시인의 단편집 '미래의 나' 중 일부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험들 속에서 믿을 건 제 자신뿐입니다. 미래의 나에게 부담을 지우고 오늘은 쉬어버리는, 대출같은 삶을 사는 중입니다. 이제 그 수많은 시험들도, 하나만 남기고 모두 끝이 났네요. 한 학기 27번의 시험, 27번이나 시험을 봐도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는 줄어든 적이 없네요. 스트레스는 그대로인데, 점점 점수나 등수에 대한 기대치는 줄어가는 중입니다. 어버버 거리다가 한학기가 끝나가네요. 이제와서? 아니면 벌써? 라는 느낌이 있지만 학기 중반부터 마음 속에 이런 말이 맴돌고 있어요.


이대로 흘러가도 되는 걸까?

 입학하기전에는 몰랐습니다, 이정도로 많은 양을 배우는지. 그냥 그저 '의대니까 많이 배우겠지'라는 막연함이었어요. 그런데...그런데...흐야ㅓㅜㅜㅜ..

진짜 많이 배워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예를 들면, 해부학을 다 배웠어요. 그런데 잘 모릅니다. 그새 까먹었어요. 신경학을 배웠어요. 그런데 지금 이순간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신경전달순서는 아직도 잘 모릅니다. 계속 모릅니다. 계속 몰라요. '좀 더 공부하고 익히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어도 그 마음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다음 과목의 다음 범위의 다음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환자를 떠나보내고 오열하는 의료진. 출처:http://m.huffpost.com/kr/entry/6914564#cb

 1학년을 무사히 마치고 진학하면 2학년, 그 뒤 3, 4학년, 4학년이 끝나면 국가고시, 국시 합격하면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이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위 사진은 미국의 어떤 의료진이 어린 환자를 떠나보내고 오열하는 모습입니다 (출처:http://m.huffpost.com/kr/entry/6914564#cb). 지금 제가 제대로 학습하지 못해서, 제가 머리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떠나보내는 환자가 생길까봐, 저를 만나 제게 진료받고 치료받게 되는 것이 환자들에게 불행일까봐, 때때로 이런 두려움이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졸업할때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학업외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담배 하나 태우며 학교를 바삐 거니는 다른 학생들을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타과 학생들은 방학인 지금,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은 아마도 3, 4학년이겠지요. 저와는 다른 길을 걷는 학생들의 오늘은 어떠한지 궁금했습니다. 20살 무렵에는 대학을 만끽하고, 제대하고 짧으면 2년, 길면 3년 그 이상의 시간을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하는 학생들. 그렇게 준비해서 원하는 곳에 취업하고, 첫 월급을 받고, 첫 차를 타고, 결혼을 준비해서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는 나이. 그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특별하다면 특별한 그런 삶을 사는 나이. 저는 아직 학생인데, 부럽기도 합니다. 제 나이는, 저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이렇게 보내도 되는지, 달라져야 하는지, 달라진다면 무엇을 달리해야 할지, 이렇게 학업에 치이며 삶의 운전대를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맡기고 그저 승객이 된 듯한 시간들을 보내는게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스티어링은 제가 잡고 싶은데 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요.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불안하고 어렵습니다. 궁금합니다, 같은 시간 속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촉촉하게 이슬로 적시고 싶은 요즘입니다.




햇볕이 좋았던 2017년 5월의 어느 날
같은 공간, 같은 시기를 함께하면서도 서로 다른 삶의 시간을 사는 사람들.
'지금'의 의미는 각자에게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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