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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Mar 13. 2023

당신, 외로운가요

<6번 칸> 당신에게 좋은 기억을 주려는 것, 추억을 함께 하고 싶을 뿐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와 유학 중인 원생 라우라.

유학 와서 만난 연인 '이리나'와 이름도 생소한 무르만스크라는 극지방으로

고대 암각화를 보러 여행을 계획했었다.


일방에서는 유통기한이 다해가는 애정,

차츰 각자의 갈 길을 가야 할 시기.

연인은 갑자기 여행일정을 취소하고,

라우라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원래 자기가 보고 싶던 것도 아닌 암각화를 보기 위한 여행을 혼자 강행한다.


 라우라와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들고 떠난 여행은 시작부터 낯선 불편함으로 가득 차 삐걱거린다.



같은 칸에서 숙식을 함께 해야 하는 대머리......

의 인상은 험악하고

언행은 무례하기 그지없다.

돈을 벌러 광산에 가고 있다는, 행선지가 같은 머머리.

중간에 내린다는 희망도 없이 꼼짝없이 이넘아와 며칠을 동거해야 함.

낡은 이국의 기차엔 양치를 할 깨끗한 물조차 잘 나오지도 않고

좁아터진 6번 칸은 맞지 않는 서로의 취향과 거슬리는 기척으로 가득하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현타가 올 법한 순간.

내가 뭐 하러 떠나온 거지. 뭘 보겠다고 이 고생인 거지.


기차 뒷자리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고, 조금씩 서로에게 세우던 경계를 허물던 두 사람.  

기차가 멈춰 선 도시, 무례맨의 본가가 있는 곳에서

사실 그동안 별 악의 없이 말을 붙였을 뿐인 무례맨은

함께 한 잔 하고 놀자고 자기 집으로 라우라를 초대한다.

이에 응하지 않았던 라우라는 낯선 도시에서 혼자 밖으로 나와

시들해진 연인에게 받지 않는 공중전화를 걸다가,

밖에서 시비를 거는 남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고 가짜 통화가 끝날 때까지 말없이 밖에서 기다려주는 무례맨...... 아니 료하의 재설득으로 료하네 집으로 향한다.


뭘 보러 간다고요? 음가카가 뭐예여?

라고 묻는 대머리 무례맨은

음각화고 뭐고 그냥 라우라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고 싶다.


죽상하고 노잼라이프인 애 같아서 집으로 초대해서 놀아주고 지엄마가 아침 싸주는 동안 안 깨우는 것도. 집에 들른 김에 출발 직전까지 장작 패서 엄마 부엌에 넣어주고 가는 것도 다, 그넘아는 츤데레니까.


아침에 다시 기차로 돌아오며 묘하게 가까워진 두 사람.

라우라는 돌아와 기차에 무임승차한 같은 나라 출신 남자를 자신들의 칸에 태워주는 호의를 베풀며

묘하게 료하에게 선을 긋고, 투박한 놈 료하는 대놓고 이 모습에 토라져 썽을 부린다.



쎄한 관상 믿고 거를 줄 알게끔 자라온 무례맨은 낯선 남자의 '가방 예쁘다'는 말에 경계하는 눈빛을 서슴없이 드러내며 가방을 뒤로 슥 안 보이게 숨겨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했지만 사실 이건 진짜로 웃을 일이 아니었어. 관상은 과학인 게 맞았던 거야. 료하는 잠깐 외출할 때도 그 일수가방 겨드랑이에 꼭 끼고 나가더라. 지는 그랬으면서도 막상 그거 털리고 우는 여자한테는 아무 다른 말(그것 봐, 그 사람 수상했다니까, 등등, 쓸데없는 말) 없이 필요한 말만 해준다. 진심을 다해, 인간은 다 죽어버려야 돼. 한 마디만.

이 세상에 그보다 더 그때의 라우라에게 위로가 될 언행이 또 존재하기나 할까?



기차에서 내려 헤어지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을 즐기자는 료하의 제안. 레스토랑에서 만찬 즐긴다고,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그럴 듯 해 보이는 체크 반팔 '셔츠'까지 챙겨 입은 료하는 일수가방에서 시계까지 꺼내 요리사에게 내어주며 비싼 술을 받아오며 그 순간을 즐기려 한다. 행선지에 다 와 가는 기차에는 충분한 재료가 없어 안주는 차디찬 샌드위치뿐.  

날 그려줘요, 하는 말에 그림 따위 그릴 줄 모른다고 답하는 료하. 전화번호 적어달라는 말에 료하는 손사래 치며 시계까지 팔아 마련한 만찬자리를 피해버린다. 어차피 각자의 길을 가야 할 너무 다른 입장의 두 사람, 어떤 시도도 부자연스러웠던 그런 관계.


두 사람은 기차의 종착지쯤에서 각자의 길을 간다. 교수라는 지위를 이용해 겨울에는 갈 수 없다는 곳까지 갈 생각이었던 연인 이리나, 이리나 없이 온 이곳에서 라우라는 암각화를 보지 못할 위기에 빠진다. 겨울에는 그곳에 차로 갈 수 없다는 것. 라우라는 다른 관광코스를 전전하며 여행의 현타를 한껏 느끼며 초조해한다. 용기를 내 걸었던 전화, 이리나는 차갑고 냉랭하기만 하다. 한달음에 달려와준 건, 료하였다.


츤데레 상남자는 다른 말 하나 없이, 라우라가  그토록 고생해서 온 먼 곳에서 헛걸음한 거 돼 버릴까 한달음에 달려와, 포기하지 않고 없는 공급도 창조하면서 원하는 걸 줘.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소심한 라우라 대신, 특유의 거친 기질을 발휘해 아 좀 해됴! 를 시전하며 추진력을 발휘함.

음가카인지 돌멩이인지, 뭔지 몰라도 당연하게 눈보라를 같이 뒤집어써주는 그게 엿이나 처머겅이 아니고 뭐겠어. 처음 등장할 때부터 나중에 뻔하게 사랑의 언어로 치환되겠구나 했던 엿이나 처머겅, 은 장황하게 건네는 약속이나 언어 안에 갇혀버린 채 말글로 서술된 마음보다 너무 그 자체의 사랑이어서 마음이 찡하네. 쭉 찢은 종이에 진짜 뭣같이 그린 라우라의 얼굴, 그 뒷장에 쓴, 언어가 가둬둘 수 없이 더 큰 날 것의 마음. 엿이나 처먹어.



함께 하려고 했던 여행, 연인이 빠져버린 여정길은 현타의 연속이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게 맞나.

이어 그 사람이 빠져버린 삶에서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사람이 없으면 의미 없을 여정은 내 인생의 내 것이 맞는 건가. 그렇게 사는 게 맞나.

낯선 타국의 것들 속에 남겨진 라우라는 근원적 외로움을 느낀다.


원하는 것을 주고,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줄 수 있는 걸 주고 싶을 뿐인 료하.

내일이 기약될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냥 그 마음과 기억 하나면 되는 거 아닌가.

당신에게 좋은 기억을 주는 것, 추억을 함께 하려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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