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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Jul 17. 2023

너, 나,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자다

<엘리멘탈>

한국계 미국인 감독 피터 손이 만든 <엘리멘탈>이 북미에서는 예상보다 흥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역주행하며 예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주인공인 '불' 엠버의 성격과 고민은 K-장녀의 것 그 자체라고 많이 회자되나, 전형적인 K-차녀이자 오냐오냐 차일드로 자란 스포일드 차일드 본인에게는 그리 정서적 공감은 되지 않아, 정서적 공감만이 국내 흥행의 원인일까는 잘 모르겠다. 세계관 또한 참신하기는 하나 사실 픽사가 독보적으로 참신하고 창의적이었던 것도 코코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부터 슬슬 충격적일 정도의 콘텐츠 화력은 끝나가고 있고, 주토피아부터는 나쁘게 보면 PC와 재탕의 연속이라고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사는 사스가 픽사여서 뭐 괜찮은 정도의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에는 아직도 화력 엄청난 명가라고 보고 있고, 현재 예매율 1위인 까닭은 글쎄 개봉 때는 나도 볼 생각 안 하다가 이제야 볼 생각 든 거랑 다들 비슷하지 않나 싶다. 다른 볼 영화가 없음. 


추상적인 것을 물성화 하는 픽사

픽사의 공인된+독보적인 특기는 여전히 있고, 그래서 뭐 티켓 값 아깝다 소리 나올 일 없이 볼만하다.

특기 1. 추상적이고 형태가 없는 것을 물성화, 의인화. 

(그리고 이 큰 세계관 설정을 한 번 한 이후 그 세계관 하에서 에피소드나 세부설정을 하는 회의는 얼마나 재미있을지 부러워서 상상도 하기 싫다. 예를 들어 물로 이루어진 소년이 있다고 하자. 이 소년이 무언가 액체를 마시면 분홍색으로 변하고, 자신 몸의 분자를 분해하여 창살로 된 문을 통과할 수 있는데 이때 옷은 벗었다가 다시 입어야 하고, 뜨거운 것을 닿으면 수증기로 분해되고, 등등.) 

특기 2. 몽글몽글 가족과 함께한 어린 시절의 행복한 향수를 자극하여 눈물샘 터지게 하는 일. 단, 이 과정에서 공업적 최루성 매운맛은 쓰지 않는다. 정말 장인이 24시간 일주일 고아낸 사골국처럼 진성으로 우려냄. 만국 공통분모로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기억 속의 이미지를 반드시 찾아내고 구체화하여 한 인간의 심적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데, 이것도 추상적이고 형태가 없는 어떤 형용사의 능숙한 물성화를 통해 가능케 한다. 통통한 아기의 손발(자녀의 어린 시절, 행복, 등의 물성화), 할머니의 쭈굴쭈굴한 손(그리운 사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기억) 같은, 모두의 기억 속에 저장된 어떤 그립고 소중한 이미지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온다. 이는 굉장히 시적이어서, 굉장히 감성적으로 사람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는데, 이 모든 게 애니메이터들의 '실제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진짜 사골로 우려낸 국밥처럼 진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황인찬 시인이 말하는 '시의 언어'도 이와 같다.

"하늘이 푸르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 되고, 컵에 물이 맺혔다는 말은 고독하다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 시라는 양식이니까요."


픽사가 그려내는 통통한 아기의 손은 그렇게 '득녀의 행복', '어린 시절의 향수'와 같은, 삶 속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또렷하게 재소환해오는 언어, 그리움이라는 형용사를 시각으로 치환한 언어가 된다.  



대신 울어주는 존재, 세상을 새롭게 보여주는 존재

피터 손 감독은 이 영화가 부모님께 보내는 러브레터라고도 했고, 엔딩 스태프롤 이후 부모님의 사진과 감사의 메시지를 담아 뭉클함을 더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부모라는 존재. 성인이 되고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이 역할은 자신과 닮아있는 소울메이트에게 인계된다. 인생에서 부모와 20세 이후 만난 연애 상대(혹은 본인이 선택하여 형성한 2차 가족)는 지금의 '나', 그러니까 성향, 성격, 취향, 가치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엠버)와 너무 다른 웨이드는, 부모님 아래서 스스로 억압했던 열망을 일깨우며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존재다. 세상을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나면 바로 말해도 되는구나, 감정이라는 게 이렇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구나,라는 걸 제시해 주는 사람. 내가 그리지 못하는 무지개를 그려 보여주고 내가 내는 빛을 벽에 투과시켜 일렁이는 무늬를 만들어 주는 사람. 화 한 번 마음껏 내기 힘들어 참으며 사는 것이 습관이 된 나에게 감정이 시키는 대로 솔직하게 웃고, 울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도 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 나조차 모르게 고이 접어두었던 슬픔을 꺼내 보면서 대신 울고 해소해주는 사람. 그리고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순간이 와도 아니면 다시 보지 못하게 돼도, 이렇게 충실히 마음을 따라 가졌던 소중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사람.


부모의 마음

하지만 우리들이 부모의 마음을 한 조각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민 1세대 부모님들이 낯선 땅에서 세탁소를 차리고 식당을 차리는 게, 과연 그들의 꿈이 세탁소 주인이나 식당 주인이기만 해서였을까. 내 자식만은 자유의 땅에서 마음껏 꿈꾸며 살 수 있게 해주고 싶고, 자신답게 살 수 있는 텃밭을 최대한 일궈주고 싶었던 게 부모의 마음이었던 거다. 

"내 꿈이 이 가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어. 내 꿈은 언제나 너였어."


부모님이 솔직하게 모든 감정을 표출하게 가르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웨이드도 마찬가지. 각자의 방식으로 소중히 품어져 온 자식들은, 부모의 품을 떠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부모에게 절을 올린다. 



타자, 이방인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엠버 홀로 밝게 빛나며 타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장면이, 다른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느끼는 이의 감정을 너무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비단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사람, 다른 인종의 사람이 다른 눈을 한 사람들 속에서만 느끼는 감정일까. 물론 직접적으로 다른 세계에 물리적으로 뛰어든 사람들은 이 감정을 비교할 수도 없이 더 강하고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늘 느끼는 건,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성장하면서 느끼는 외로움도 많이 되짚어보게 된다. 누구나 다수의 사람들 속에 쉽게 융화되어 녹아들고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 일부는 자라면서 나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타자와 나의 같고 다름을 가늠해 보며 적응해 나가는 게 곧 어른이 되는 일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부모나 애인(혹은 2차적으로 이룬 가족)이 준 지지와 믿음, 사랑 같은 것을 먹고 자란다. 그 신뢰와 절대적 사랑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서게 하고 외롭지 않게 하고, 타자와 다른 나 자신을 미워하기보다는 특별하게 여기게 한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이 영화에서도, 나는 픽사가 그 과정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픽사의 영화를 보다 보면,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부모님이나 가까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고마워서 울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이건 정말 공업적 최루가 아닌 진심의 감동이어서 언젠가부터 픽사의 영화를 볼 때면 울 각오를 하고 보게 된다. 


엠버 아빠의 이름 '아스파'는 사실 '아빠'를 어원으로 지은 이름이고, 웨이드가 삼키는 뜨거운 숯콩은 매운 한국김치에서 착안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민 1, 2세대는 성장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편견과 차별을 직접 몸으로 받아 내었을까, 그들이 정착 초반에 겪었을 에피소드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천지가 개벽할 만큼 바뀐 세상 또한 새롭다. 



어찌 낯선 인종만 타자이겠는가. 너, 나,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원래부터 타자다.


너와 나는 때때로 같은 물이어도 섞일 수 없고

너와 나는 때때로 물과 불이어도 결합하는 것이다.  


웨이드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순간에 후회 없다고 말한다. 그 순간들을 가져본 것만로도 충분할 만큼 벅차게 행복했던 기억이 나도 여러 차례 있다. 물과 물의 결합인 적도 있고, 물과 불의 결합인 적도 있는데, 상대가 동류여도 내 세계는 확장되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어도 나는 새로운 세계를 겪으며 커진다. 웨이드와 엠버의 결합처럼 특별한 무언가를 새로 생성해 내는 타자와의 결합은 내 세계를 엄청나게 확장해 주고 새로운 것을 알게 한다.  타자의 세계를 넓혀주고 나 또한 타자를 통해 내 세상을 넓혀나가는 일, 그런 삶의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희로애락과 감정들을 이렇게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픽사가 있기에 자주 멈춰 서서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내 삶과 주는 의미와 내 영적 성장에 주는 영향을 물성화하여 정리할 기회를 갖는다. 



*2016년쯤 '힙스터 테스트'라는 것을 해보면서 "물성"이라는 단어 SNS에 많이 쓰면 힙스터라고 누군가 약간의 조롱을 섞어 적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 느낌을 조금 곱씹으면서 물성이라는 단어를 남발해 본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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