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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DAK 노닥 Jan 23. 2023

근사함

에 대하여



근사한 하루를 보냈다고 일기를 써보자.


설마 근사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순간들이 귀에 속삭이며 ‘나, 근사했잖아.’ 하고 속삭일 것이다.

물론 그 순간들이 우리의 기억들을 조작해서(?)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단순해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할지라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 남들 보기에 정말 근사한 하루를 보냈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절망만을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사람도 있으니 사람의 하루는 정말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내 경우에 일단 많이 걸으면 근사한 하루다.

또 아무 영양가 없는 일과라 할지라도 체크리스트를 다 채운 날이면 근사한 하루다. 카페에서 열심히 글을 써서 A4용지 한 장 남짓의 소설을 채우면 근사한 느낌이 든다. 좋은 옛 영화를 발견해도 근사하고, 필름으로 하루의 일부분을 기록하는 것도 근사하다. 목욕하는 것도 근사한 일이고-


몇 년 전,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당시에 아버지와 함께 부산여행을 단 둘이 간 적이 있다.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다 느껴본 적이 없는 무감수성의 18세 청년이 편한 아웃도어 의자에 앉아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밭 뒤로 지는 오렌지빛 낙조를 구경하는 현장은 정말 근사한 인생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날 저녁 식사는 랍스터 찜이었는데 그것 역시 근사했지만 장엄하게 내리깔아 움직이는 태양의 모습은 압도적인 무언가가 흘러 넘쳤다. 태양신을 섬겼던 고대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이해할 법도 했다.

아이폰4s、 당시 부산여행에서 찍은 현장인데... 옛 나의 감성은 필터로 요렇게 노랗게 보정하는 것이었나보다... 원본이 없다..


당시 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기억상으로 이 현장과 음악을 같이 새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협주곡을 들을 때마다 그 때의 현장이 생각나서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근사함 MAX를 찍었다고나 할까.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선명하니 인상적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작은 일에도 근사함을 느끼고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경우가 늘어간다.

내 경우 꽃이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꽃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친구도 생기고 꽃말도 알아보게 되니 식물의 ‘꽃’ 상태가 참으로 덧없이 고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애정을 가졌다.

흐르는 물 곁에서 피어난 곱고 애처로운 모습도 사랑스럽고 들판에 피어난 억척스러운 모습도 애교스럽다.

그래서인지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 할지라도 주변에 피어있는 선명한 색의 꽃 한송이로도 힐링이 되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근사함을 순간 속에서 느낄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해두니 친구들이 다 ‘우리 엄마인 줄 알았다’ 는 반응은 또 근사한 재미를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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