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란 무엇이며, 뭘 하는 사람일까? 작가의 사전적 의미는 예술과 취미의 분야에서 창작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글을 창작하는 사람은 글작가라 부르고 사진을 만드는 사람들은 사진작가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작가 아닌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스러운 능력이기 때문이다.
지난 날을 생각해볼 때, 특히 사진을 열정적으로 찍었던 때를 기억해보면 그 때의 일들은 이불킥을 할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사진에 학파 정도는 있어야 한다면서! <학파를 모집합니다!> 라는 자신만만한 글을 인스타에 쓴 적도 있고, 개똥철학을 펴내면서 시집과 도덕 서적을 출판해본 적도 있다.
사람이 스스로가 작가라고 생각하면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 긍정적인 요소를 살펴보자. 일단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되면 스스로가 생산하는 모든 창조의 산물들이 하나하나 소중해진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개똥같은 것이 있나?’ 할 법 해서 휴지통에 던져버릴 것들도 애정을 기울여 한 번 더 살펴보고, 퇴고하다가 꽤 좋은 결말의 글을 쓰기도 한다. 내가 작가라는 직책의 의무를 수행하고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영향을 끼치겠다는 홍익인간의 정신이 발휘되는 순간 우리의 세계는 조금이지만(정말 아주 쬐끔이지만!) 밝은 빛으로 변한다. 사람이 치유되는 순간이다.
두 번째로 부정적인 요소를 살펴보면, 작가라는 타이틀에 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뭐 벼슬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게 된다면 더 위험해진다. 글작가든 사진작가든 어떤 작가든 다른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헐뜯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범했던 뼈아픈 실수가 그것이다. 내가 찍는 사진이 옳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며 ‘미학적인 요소가 부족하네-‘ 따위의 말을 하게 된다. 너무 자신감이 넘쳤는지 그런 일들이 지속되다 보면 사람이 참으로 비좁고 작은 자가 된다. 창조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게 아니라, 존재에 매번 ‘가치’를 부여하면서 옳고 그르니 틀리고 맞니 이런 이야기를 하며 좀스러운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런 작가였지만 시간이 지나 부정적인 면을 탈피하고 한결 더 나은 작가가 된 것 같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대학원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학부에서는 모든 것을 다 안 듯이 생각하지 않던가? 책 한 권에 자신만만하던 그런 느낌이었다면, 대학원은 ‘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하는 느낌이다. 그렇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서 오로지 내 글과 내 사진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바꿔서 가장 존경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백이면 백 헤르만 헤세라고 대답할 것 같다. 헤르만 헤세는 길고 긴 인생의 터널길 속에서 출구를 바라보게 했던 유일한 작가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나를 터널길로 인도했다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라는 책은 아직 반절 정도 온 터널길 속에서 반짝이는 출구를 직면하게 만들었다. 헤르만 헤세의 단골 주제는 자아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의 소설 속에서는 기독교 신앙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항상 등장한다. 그 소년은 어려서 신학을 배우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일을 한다. 그 소년이 진정 원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자아의 성장이 매 순간 일어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이 극적으로 바뀐다. 이 극적인 흐름을 좋아하는 까닭은 아마도 내가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한 주인공과 비슷한 인생을 살아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집에서 태어났고, 신학을 배웠으며 끊임없이 이 길이 맞는지 크눌프처럼(크눌프), 한스 기벤라트처럼(수레바퀴 아래서), 골드문트처럼(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끝없이 방황하며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헤세를 천국에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하고 안아주고 싶다. 그는 나의 모세이며, 바울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