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 특히 이삿짐을 싼 다음의 집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이곳이 이렇게 넓직했었나?’ 하고서 놀랄 정도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느낌 때문에 나는 이사를 싫어한다. 빈 공간을 바라보는 것만큼 우울한 일은 없으니까.
봄 되면 여름을 원하고, 여름 되면 가을을 원하고.. 이런 것도 공허가 아닐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똑같은 빈 공간을 마주하더라도 이삿짐을 풀 곳을 바라보면 괜한 희망을 갖게 된다. 앞으로 어떤 생명들로 이 공간을 채울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면 이곳은 나만의 공중정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창문 아래 침대를 놓고(햇볕을 싫어하면서!) 어두컴컴한 곳에 책상과 간접조명을 둘 거야, 식물은 다육이가 좋겠지, 아 참 책장은 어떻게 한담- 하는 생각들은 차가웠던 공간에 따듯함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이사가 좋다. 빈 공간을 바라보는 것만큼 희망 가득한 일은 없으니까.
다만 공간이 아닌 사람의 마음일 경우에 문제가 복잡해진다.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어줍잖게 주워 담은 이야기들을 풀어보자면,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것으로든 채울 수 없다고 한다.
마음은 깊은 심연이 드리워진 깊은 우물과 같아서 그 안에 어떤 지하수가 흐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심지어 바닥을 드러내서 딱딱한 돌만 가득한 우물이라 할지라도 직면하기 전까지 모른다.
그것을 채우고 싶어서 다른 곳에서 끌어오는 물을 한가득 풀어놓는다 할지라도 이게 뚫린 우물인지, 막힌 우물인지를 모른다. 그 만큼 사람의 마음은 답답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어서 뭔가로 채우는 도중에도 ‘채워지지 않는’ 감정을 느낀다.
사랑으로 채워봐도 소용없을 때가 있고, 술을 부어봐도 마찬가지다. 황금 동전을 쏟아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소용없고 음식도 똑같다. 그 우물에 아무리 가득 채워본다 할지라도 우물의 주인이 ‘아냐, 소용없네.’ 하는 순간 텅- 하고 비어버리는 마법이 일어난다.
마음을 채우는 일이 가능하냐? 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채워야 할 마음의 만족의 크기를 좀 줄여야겠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 같다.
만족의 크기를 줄이면 저 냄비처럼, 뭐가 들었는지는 알 수 있을테다.
우물의 사이즈가 너무 크면 공허 때문에 뭘로 채워도 소용이 없으니 만족의 크기를 일부러 줄이는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멘트를 채워서라도 그 깊이를 손봐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적당한 크기는 양동이다. 양동이는 한 눈에 물의 깊이를 볼 수 있다. 채워도 적당하게 무겁다. 들고 다닐 수도 있고, 쉽게 채울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으니 참으로 간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기대함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한다. 우물같이 거대한 스케일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양동이의 크기가 되면 그 안에 무엇으로 채우든 간에 ‘이미 반이나 채웠다고!’ 하는 긍정적인 목소리가 들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