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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DAK 노닥 Jan 26. 2023

후회

에 대하여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중.

초등학교 6학년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물론 ‘악기 하나는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교육철학 때문에 시작했고 거의 5년동안을 마음을 질질, 억지로 끌면서 동그라미 몇개를 허투루 그려놓았던 야매(?) 피아노 인생. 중학생이 되자마자 그만둬버려서 아예 피아노라는 흔적 자체를 집안에서 없애버렸다.


그러나 피아노라는 악기가 발산하는 새로운 매력 때문에 최근 5년간 마음 속에 큰 후회가 막심하다. ‘그 때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고 하루 30분씩만 꾸준히 연습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피아노와 클래식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피아니스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전에 쇼팽의 음악은 나에게 너무 구렸고(미안해요 쇼팽), 베토벤 소나타는 심심했으며(죄송합니다 베토벤), 모차르트는 쓰잘데기 없이 밝아서(할 말이 없습니다 모차르트) 싫어하던 기억이 있다. 좋아하는 곡 몇곡만 반복해서 들을 뿐 클래식 피아노는 나에게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음악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로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나온 뒤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곡 한 곡 한 곡을 세심하게 들어보고 반복해보면서 클래식 피아노가 가진 무궁무진한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 마음 한 구석에는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언제나 자리하고 있으면서 매 저녁마다 그랜드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그런 느낌이 든다. 무심하게 씨익 웃어주면 그것만큼 포상이 없지.


얼마 전, 영화 <피아니스트>를 관람했다. 폴란드를 침공했던 2차대전 당시의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인데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슈필만’은 죽을 위기를 여럿 넘기고 결국 전쟁 후에 다시 피아니스트로 활동한다는 그런 줄거리다.


슈필만은 영화 속에서 유대인 차별적인 독일의 거대한 힘 앞에서 모든 가족을 잃게 된다. 그는 초반에 폴란드를 떠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만 그 후회를 털어버리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어떤 고난이 그를 기다린다 할지라도 그에게 보이는 것은 지나간 삶이 아닌 살아내는 현재가 있다. 그래서 그의 눈빛은 영화 내내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선명했다.


마침내 영화의 끝무렵, 독일군 장교가 그를 발견한 다음에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난 피아니스트에요.”
“연주해보시오.”
독일사람 앞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열연하는 그 모습에 그만 얼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지난 몇 년간 그는 단 한순간도 피아노를 연습해본 적이 없어서 이제는 ‘피아니스트’라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추워서 입김이 나오는, 심지어 세팅도 안 된 그랜드 피아노를 통해 독일군 장교의 마음을 움직인다.

후회,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원한다면 일단 현재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서는 과거에 내가 분명히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끈끈한 연대가 살아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중요한 순간에 ‘나는 피아니스트입니다.’ 하고 말했던 그 슈필만처럼 ‘나는 글쓰는 이입니다.’하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후회를 뒤로하고 한 글자를 쓴다(아쉽게도, 피아노는 후회 막심한 그 상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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