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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얼솜 Oct 19. 2022

김치가 왜 양배추?

[만 9세 소녀의 나 홀로 유학 생활 - #3]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무슨 맛으로 밥을 먹을까~ 

자랑스러운 K-푸드의 대표주자 김치. 나는 김치 없이 정말 밥 먹기가 힘들다. 아직도 처음 김치를 접했던 날이 기억난다. 작은 빌라에 살 때였으니 아마 기껏해야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거실에 불그스름한 동그란 상을 펴고 다 같이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나 다 같이 밥을 먹었다. 그날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내 옆에 엄마가 아직 어린 날 위해 밥에 된장 국물을 조금 얹어 살살 비벼주셨다. 그때가 공식적으로 내가 김치에 입문한 지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내가 김치를 먹겠다고 한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숟가락 위에 한 스푼 가득 밥을 뜬 후 김치까지 얹어서 먹었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음, 나 김치 먹는데? 하나도 안 매워! 진짜 맛있는데?" 엄마랑 아빠는 연신 진짜냐며, 물을 주겠다고 하셨는데 난 정말 맛있어서 계속 먹었던 것 같다.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시작된 내 김치 사랑. 다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않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서 물어볼 만큼 '나 홀로 유학생활'에 빠르게 적응을 한 나였지만 사실 꽤나 오랜 기간 애먹었던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어학원에서 식사 때 나왔던 김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겉에 고춧가루만 묻은 양배추 무침이라고 해야 하지 싶다. 고기 대신 콩고기 반찬만 나오는 식단에도 살아남았는데 정말이지 그 양배추 김치는 도저히 입맛에 맞지가 않았다. 거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양배추 김치가 담겨있던 식탁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적이고 싫었나 싶다. 


양배추에도 빨간 고춧가루가 묻을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빨간 양배추 고춧가루 무침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을 때에는 당연히 필리핀 음식인 줄 알았다. 그리고 다른 반찬들이 하나둘씩 올려지며 오매불망 언제 김치가 오려나 싶었다. 그런데 끝까지 안 왔다. 궁금한 건 참지 않고 물어보는 것에 거침이 없었던 나는 바로 다른 식탁에 앉아 계셨던 원장 선생님께 갔다. "선생님. 근데 김치는 언제 나와요?" 선생님은 당돌한 내가 웃기면서도 밥을 안 먹을까 걱정하시는 얼굴로 말씀하셨다. "너네 식탁에도 이거 있지, 빨간 양배추? 이게 여기 김치야." 오잉?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 싶었다. 김치가 왜 배추가 아니고 양배추로 만들어지지? 지금까지 내가 먹었던 김치는 배추나 무, 오이, 아니면 파 정도였다. 양배추는 쌈밥이나 마요네즈 사라다에 쓰이는 거 아닌가?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른 말에 말대꾸하면 안 되는 거라고 주야장천 학교에서 배웠던 나는 마지못해 "네"하고 대답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배추도 어쨌든 배추니까 비슷한 맛이 나겠거니 하고 먹었다. 하. 양배추는 양배추였다. 묘하게 단맛과 동시에 내가 바로 야채입니다 하는 풀 맛. 거기에 아무 양념 없이 묻은 입자가 큰 고춧가루. 고역이었다. 


이후 매 끼니마다 의도치 않게 한국에서보다 밥을 적게 먹었다. 나는 당시 키가 140cm 정도로 또래에 비해 큰 편이었고 굉장히 퉁퉁했었다. 그즈음 단골 별명은 돼지였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안 그래도 1년 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에 사랑하는 밥친구 김치까지 없으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먹는 양이 줄어들고 몸무게가 계속 줄어들어 총 10kg가 넘게 빠졌다. (훗날 엄마는 살이 빠진 내 모습을 보고 정말 펑펑 우셨다. 안쓰럽다면서.)


지금이야 아이들이 워낙 성숙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다이어트를 한다지만 나는 살이 찌고 빠진다는 개념조차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지내던 언니들이나 선생님들이 "키미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라고 말하며 놀랄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나 김치 없어서 그런가 봐! 김치 먹고 싶어. 도대체가 밥 맛이 없는 거 있지? 콩고기도 괜찮고 공부도 괜찮은데 김치 때문에 한국이 그리워 죽겠어!"라고 퍽 어른 말투를 따라 하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내 대답에 빵 터져 웃었지만 나는 정말 진지했고 또 괴로웠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식탁에 김치가 올라왔다. 양배추로 만든 가짜 김치 말고 때깔이 고운 빨간빛의 배추김치 말이다. 세상에나. 너무 놀랍고 신나서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큰 소리로 말했다. "와! 김치! 이거 어디서 난거지? 꿈이야 생시야? 이거 진짜 김치야? 이제 한국 안 가고 싶다!" 앉은자리에서 족히 세 그릇은 먹었다. 선생님은 엊그제 한국에서 오신 이웃집 분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김치를 많이 얻었다며 먹고 또 줄 테니 천천히 먹으라고 하셨다. 아하. 누군가가 한국에서 오셔야지만 김치를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의 한국 출장 스케줄을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웃기지도 않은 여자애가 있다 싶다. 영어 공부하라고 보내 놓았더니 영어 공부보다는 김치를 먹기 위해 어른들께 혹시 언제 한국 가시냐고 물어보고 다녔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 배추값이 거진 2만 원 정도로 물가가 훅 오른 지금 스멀스멀 배추김치의 대체품으로 '양배추 김치'가 유행하고 있다. 당장 포털 사이트에 양배추 김치를 검색해도 아주 맛있어 보이는 벌건 양념의 양배추 김치 레시피들이 줄지어 서있다. 너무나도 웃픈 이야기. 만약 나도 그런 제대로 된 양배추 김치를 먹었었다면 젖동냥하는 애처럼 김치 찾아 여기저기 산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을 거다. 그 요상한 음식에 이름을 지어주고 싶을 정도다. 그래, 가가얀 양배추 김치. 내가 살던 가가얀에서만 먹을 수 있던 그 양배추 김치. 지금 먹으라고 해도 도저히 못 먹었을 것 같은 가가얀 양배추 김치. 그래도 덕분에 살이 빠져서 소아 비만에서 벗어났으니 고마워해야 하나? 하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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