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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엄마 Nov 08. 2017

'예솔 엄마' 아닌 김승희를 만나다

보통엄마 인터뷰 03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에 답하기 위해 글을 쓰고 엄마를 만납니다. 모성과 희생, 사랑이라는 흔한 보통 엄마의 조건을 벗어나 ‘진짜’ 엄마의 목소리를 전하고자 합니다. 엄마라는 단어로 뭉뚱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조금씩 다르고, 독특하며, 때로는 불편할지라도 엄마란 이름 뒤에 가려진 이야기 하나 하나가 모두 ‘보통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이 시대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예솔 엄마 이름 때문에 잊고 살았던 김승희를 만나다


김승희(47) 씨는 딸 셋을 둔 싱글 여성이다. 스물둘에 결혼해 이른 나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는 전업 주부이거나 파트타임 노동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2012년 이혼을 결심했고, 현재는 한 사람의 직장인이자 가장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첫째, 둘째 딸이 함께 자취를 시작한 뒤로 김승희 씨는 경기도 화성의 아파트에서 막내딸과 ‘솜’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데리고 살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것은 첫째 딸 임예솔(25) 씨다. 임예솔 씨는 스무 살이 되어서야 엄마가 오랜 시간 이혼을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엄마가 한 사람의 개인으로 보인 것도 그때부터다. 이전까지는 자신도 '엄마는 왜 아빠를 이해하지 않느냐' 물었던 무심한 딸이었다고, 외향적인 줄만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혼자서 오랜 시간 외로웠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가족은 점점 넓은 집으로 터전을 옮겼다. 시골 주택에서 저층 빌라로, 빌라에서 아파트로 평수를 넓혔다. 하지만 가족 사이는 안으로 곪고 있던 모양이다. 임예솔 씨는 우여곡절을 거쳐 네 식구가 완성된 요즘을 가장 좋은 때라고 꼽는다. 엄마가 한동안 멀리한 책을 다시 읽고, 식물을 들이고, 자신의 공간을 꾸미는 모습이 기쁘다며. 엄마에게도 지금의 생활이 편안하게 느껴지길 바라고 있었다.




자기소개를 직접 해주신다면.

이름은 김승희.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세 딸의 엄마다. 자랑할 만한 게 없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어서 인터뷰에서 해줄 말이 더 있을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자연스럽게 해주시면 좋겠다. 어디서 태어나셨나. 

전라남도 장흥에서 1남 3녀 중에 첫째로 태어났다. 6살 때까지 장흥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고 해서 광주로 옮겼다. 나는 쌀쌀맞은 딸이었다. 스스로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느꼈다. 아버지 가사 업을 한다고 하면서 당시에 엄마가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 시댁이 농사를 지으니 엄마가 시간만 나면 내려가서 농사일을 도왔는데, 엄마는 막내만 데려가고 내가 집에서 동생들 밥 챙기면서 지냈다. 스무 살부터는 타지에 나와서 살았으니 더 혼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부모님한테 정을 많이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첫째 예솔 씨의 나이에 비해 어머님이 젊은 편이어서 놀랐다. 결혼을 일찍 하셨다고.

스무 살에 광주에서 안양으로 올라와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경찰서 경리로 차트 정리나 심부름 같은 일을 하다가, 안산으로 옮겨서 골프장 캐디로 3년 정도 일했다. 그리고 스물둘에 결혼을 했으니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편이다.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홀로 지내다 보니 외로워서, 당시만 해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부모님 반대는 없으셨나.

솔직히 반대가 심했다. 아마 전 남편이 직업이 없었던 상태라 그랬을 거다. 원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사람인데, 아버지 병세가 깊어지면서 1년 동안 고향에서 농사를 도왔다고 했다. 시골 생활을 막 정리했을 쯤에 만남을 가졌고. 처음 우리 집에 인사하러 갔을 때는 다른 선 자리가 있으니 알아보라고 했었다. 아마도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도 결혼 후에는 처가에서 사랑받는 사위가 됐다. 그래서 이혼할 때도 아버지가 참 많이 아쉬워했다. 


스물 두살, 결혼식을 올린 해의 김승희 씨. 이듬해 첫째 딸 예솔 씨가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첫째 낳을 때가 스물셋이었다. 예정일이 일주일 지나도록 출산 기미가 안 보이는 거다. 애 아빠가 머리가 큰 편이어서 그랬나. 첫째 머리가 다 컸으니 뱃속에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제왕절개를 했다. 깨어나니까 미치도록 아프더라. 내가 너무 아프니까, 애 보러 가자는 말에도 가기가 싫을 정도였다. 겨우 가서 아이를 봤더니 ‘내 자식이구나’ 싶어서 울컥하기는 하더라. 그래도 살가운 엄마는 못 됐다. 아이가 밥을 안 먹는다고 달려가서 먹이고 그런 거를 해본 적이 없다. 


이사를 굉장히 많이 다녔다고 하더라. 예솔 씨가 시골집에서 지낸 기억을 들려줬다. 

아홉 번 정도 이사를 다녔나. 애들 아빠가 고정 수입이 없을 때라, 이런 일하고 저런 일할 때마다 따라서 이사를 다녀야 했다. 결혼하고 처음에는 안산에서 살았다. 1층에는 상가가, 2층에는 투룸이 있는 건물이었다. 광주의 친정 집에 머물기도 했고, 광주에서 올라올 때는 돈 한 푼이 귀해서 비봉리에 폐가 수준의 집을 얻어 살았다. 얼마 살진 못했다. 곧 미용실 문간방으로 이사해서 1년 정도 살았다. 애들은 아마 이때 기억이 많을 거다. 미용실 오빠랑 자주 놀고 했으니까.


낯선 동네에서 의지할 곳이 있었나.

그때 나이가 스물일곱, 여덟쯤 됐을 거다. 동네에는 어르신들 밖에 없었다. 농사지은 거 나눠주시면 잔치국수를 하거나 전 구워서 내드리곤 했다. 그때는 새색시가 예쁜데 이런 것도 해준다고 칭찬을 받았다. 고향 친구와는 연락이 다 끊겼던 상태라 어쩔 수없었다. 거기서 사업이 잘 풀려서 빌라로 옮겼고, 그때부터 같은 건물에 사는 또래 아이 엄마들과 친해졌다. 20년 전이라 지금은 연락이 거의 안 되지만, 한창 재미있게 보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지리산 화엄사로 여행을 떠났던 스무살의 김승희 씨(왼쪽에서 세번째). 어느 사진 작가가 찍어준 것이라고.


지난 인터뷰에서 만난 분들 대다수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생활 반경이 동네에 사는 엄마 모임으로 한정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아니라서 외롭다고. 

그랬다. 아이들 키우며 만났던 엄마들은 진짜 친구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서로의 가정사를 어느 정도 공유하지만 진짜 깊은 이야기는 안 하고 지내니까. 연락을 계속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아이들 데리고 맛있는 것 먹으러 가는 정도였다.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는 학창 시절 친구들인 것 같다. 그마저 오랜 시간 연락이 끊겼다 10년 전부터 만나고 있다.


집에서 꿈꿨던 공간이 있나. 이사를 워낙 많이 해서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꾸릴 생각을 못 하셨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작은 마당이 있는 단독 주택에 살았는데, 나도 그런 집에서 살았으면 했다. 그런 집에서 가족끼리 단란하게 지내는 게 꿈이었다. 


그런 집에 살아 보신 적이 있나.

없었다. 그나마 가까운 건 시골에 일 년 동안 살았을 때다. 허름한 집이어도 행복했다. 아이들에게도 밖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으니 좋았을 거다. 가족 사이도 참 단란했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냐고 하면 시골 생활을 했던 때라고 말하고 싶다. 젊은 엄마들과 어울리지는 못 했지만.


집안 사정은 그때 이후로 좋아졌다고 들었다. 시골집에서 빌라로 이사를 갔고, 빌라에서 점점 넓은 아파트로 옮겼다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고 하지 않나. 살림살이는 여유로워도 사업이 바빠서 가족 사이는 소원해졌다. 시골에서는 남편도 일찍 퇴근해서 항상 같이 밥을 먹었다. 저녁에 웃으며 이야기 나눌 시간도 있었고. 그런데 사업이 잘 풀리면서는 애들과 보낼 시간이 없더라. 애들은 넓은 집에 살아서 좋았나 몰라도, 나는 그런 풍요 속에서 늘 불안했다. 이런 여유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서. 결국 오래가지는 못했다.


김 씨와의 인터뷰는 자택에서 진행됐다. 마침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는 첫째, 둘째 딸과 막내가 모두 모인 날이었다


물리적으로 넓다고 마음을 기댈 공간이 생기는 건 아닌가 보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스스로에게도 중요한 결심이셨을 것 같아 묻고 싶다. 이혼을 생각한 건 어떤 이유였나.

하루아침에 결정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참고 산 부분이 많았다. 다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았다. 어렸으니까, 몰랐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살다 간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게되겠다’고 생각했다. 내 주장을 표현하기 시작하며 부딪혔고, 그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애들에게는 갑작스럽다고 느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빠가 좀 바빴을 뿐이니까. 하지만 때가 되면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막상 털어놓을 때는 마음이 많이 정리된 상태였다. 첫째가 대학 입학하고 나서 이야기를 했다.


예솔 씨가 인터뷰에서 이혼 후에 사진 앨범을 다 정리한 걸 보고 놀랐다고 했었다. 슬펐다기보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이 되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스스로 냉정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련 없이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과 연을 맺게 되더라도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사진에 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딸들이 나온 경우는 버리지 못하고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결국 감정 정리에는 도움이 많이 됐다. 감정 정리를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끌려 다닐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화분, 악기 같은 소품들도 싹 정리를 했다고 하시던데, 책만은 그대로 두셨다고 하더라. 요즘도 책을 많이 읽으신다고 들었다.

예전부터 책은 좋아했다. 외출하면 꼭 서점에 들렀고 중고 서점도 종종 갔다. 뭐라도 하나씩 사 오고 그랬다. 당장 읽진 못 하더라도 책꽂이에 두고 보는 게 좋았다. 요즘은 집 전체가 나만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애들도 엄마가 조용히 있고 싶을 때 자리를 피해 줄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까. 특별히 나만의 공간을 꼽는다면, 책장 하나 있는 내 방이다. 거기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쉬거나 한다.


 베란다에는 김승희 씨가 요즘 즐겨 읽는 책과 다육 화분들이 모여 있다. 그의 손을 가장 많이 타는 공간이다.


우리가 이번 기획을 준비하며 이혼 후의 엄마를 생각해보지 않았더라. 이혼을 하면 의지와 무관하게 전업 주부가 될 수만은 없는 거였는데. 갑자기 생계를 책임지기가 부담스럽지 않으셨나. 이전까지 일을 하신 경험이 있나.

전업주부도 모여서 수다만 떠는 거 지겹다. 첫째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부터 일을 했다. 처음 했던 일은 선거 활동이었다. 유세 활동에 참가하면 일당을 준다고 해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했다. 그러고 나서 우체국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아침에 밥 먹여서 둘 학교에 보내고, 막내는 유치원 데려다주고 나서 유치원 앞 우체국으로 나갔다.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으니 오후 되면 돌아와서 집 청소하고 저녁 준비해서 밥 먹이고 그랬다. 


가사 일에는 엄격한 타입이었나.

집에만 있으니 쓸고 닦고 하는 게 일이었다. 남들이 모델하우스라고 할 정도로 깨끗하게 집 청소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청소하고 나면 애들한테도 밖에서 놀라고 했을 정도다. 바깥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가사 일은 계속했다. 빨래, 청소, 빨래, 청소 반복했던 것 같다. 남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식품 기업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일하고 계시다. 입사 시험을 수개월 준비해서 얻은 결과라고 들었다. 오랜만의 공부라 어색하지 않으셨나.

운전면허 따고는 처음 하는 공부였다. 식품 기업이라 위생 시험 등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험 범위는 넓은데 어디서 문제가 나올지 모르니 열심히 공부하게 되더라. 5개월 정도 정말 열공했다. 절대 다시 못할 것 같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결과다. 결혼 후에 그만한 경험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을 테고.

성취감이 정말 컸다. 서른 명 안팎이 시험을 봤는데 열 명만 뽑았다. 시험 점수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고, 근무 평가라든지 다른 것도 종합적으로 본다고 했었다. 기대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불러서 울컥했다. 성취감이 정말로 대단한 거더라. 남들에게 칭찬을 잘 하지 못했던 게 그만한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다. 받는 것이 어색하니 주는 것도 어색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어떤 부분이 가장 많이 변한 것 같나.

원래 남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성격에 모난 부분이 많았다. 남들이 나를 무시할 거라는 강박이 있었다. 애들한테 물어보면 엄마가 소리도 많이 질렀다고 그럴 거다. 바깥 생활을 하다 보니 그런 성격을 다 내놓으면 안 되겠더라. 그런 성격이 오히려 날 힘들게 한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성격도 많이 유해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애들이 어렸을 때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었으면 더 다정하게 안아줬을 텐데.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미안하다. 예전에는 화풀이를 아이들에게 했던 것 같다. 첫째 딸이 나에게 많이 맞았다. 잘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아팠을까 싶다. 그래도 어쩌나. 세월은 이미 지나갔고, 아이들은 다 커버렸다.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더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답하려고 한다.


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재의 직장에 입사한 김승희 씨. 앞으로는 스스로 건강을 챙기며 꾸준히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싶다.


또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지 궁금하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직장생활 계속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다. 평범하게. 무엇보다 딸들이 하고 싶은 일 다 해보면서 열심히 살면 좋겠다. 나는 요즘 퇴근 후에 요가를 배우러 다닌다.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워킹맘이니까, 건강해야 가족도 챙길 수 있으니까. 


딸에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젊은 시절에 더 많은 경험을 해볼 걸 하고 후회되는 때가 많으신지.

정말 많이 한다, 그런 생각. 하고 싶은 걸 하나도 못 해봤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남자 친구도 여러 명 사귀어 보는데, 나는 그걸못 해봤다. 우리 딸들에게도 늘 이야기한다. 결혼 안 해도 된다고. 대신에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나랑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다. 내게도 조금만 더 자신감이 있었다면, 더 활달한 성격이었다면 결혼을 안 했을 것 같더라. 그래서 더 엄하게 키웠다는 생각도 든다. 스스로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게 하려고.


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으신가.

애들이 크면서 외출을 많이 못 해본 것 같다. 사정이 좋았을 때는 애들이 어렸고, 정작 함께 할 나이가 됐을 때는 가세가 기울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첫째는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집에 왔고. 둘째나 셋째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해줘서 미안하다. 올해는 같이 여행 가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재작년인가. 아산에 있는 휴양림에 1박 2일로 여행을 갔는데 좋더라. 딸이랑도 가고 싶고, 혼자서도 여행을 가고 싶다. 예전에 한번 혼자 산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되게 좋더라고. 거기를 한번 더 다녀올까 싶다. 


혼자서는 어떤 여행을 하고 싶으신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여행. 가서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힐링을 못 하고 오더라. 애들이 어렸을 때는 밥은 잘 먹었을지, 가스 불을 만지지는 않았을지 걱정을 많이 했다. 가스 밸브나 보일러 잠그라는 전화도 많이 하고.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바람만 맞아도 좋을 것 같다.




“동생 한대 쥐어박아. 엄마가 뭐라고 안 하니까.” 먹성 좋은 동생이 예솔 씨의 몫을 뺏어 먹을 때면, 엄마는 되려 주눅 든 그를 꾸짖곤 했다. 예솔 씨는 장녀로 굳세게 살았던 엄마가 자식은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했던 말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한때 예솔 씨는 엄마 승희 씨에게 꿈을 물은 적이 있다. 당시 그는 '현모양처'라고 답했지만 2017년, 김승희 씨가 들려준 그의 어릴 적 꿈은 사실 여경이나 여군이 되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라던 엄마에게, 이제는 딸이 같은 말을 건넨다. 지금이 당신의 전성기라고. 엄마라서 못 했던 일들을 지금부터 해보자고. 엄마가 자신을 낳았던 나이를 훌쩍 넘긴 첫째 딸은 엄마가 아닌 한 여자를 생각한다. 세 딸의 엄마로 살았던 사람, 그러나 언제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던 사람. 어쩌면 그에겐 숨겨진 이야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인터뷰가 엄마 승희 씨와 첫째 예솔 씨의 사이에 작은 다리를 하나 더 놓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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