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딸기> 리뷰
“이삭 보리는 나 자신이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내 아버지를 닮았지만, 사실 내 자신인 인물을 창조해내었다. 그 때 나는 37세였고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나는 외톨이였고, 실패자였다. 비록 출세하였고 영리하고 질서정연하며, 규율 잡혀있기는 하였지만.....”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영화 <산딸기>가 자신의 이야기라 말한다. 이삭이란 인물을 영화라는 제의에 본인 대신 희생의 제물로 바친 것이다.
라깡은 꿈이란 억압된 무의식,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쾌감, 억눌린 욕망을 대면하게 되는 실재의 공간이라 했다. 이삭의 첫 번째 꿈은 인적 없는 도시의 거리에서 시작한다. 창문들은 굳게 닫혀있다. 이삭 주위엔 아무도 없다. 공허함이 지배하는 이 공간은 이삭의 마음 속 풍경이며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삭이란 인물을 관통하는 핵이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뒷모습으로 등장한 꿈 속의 신사는 얼굴이 억눌려있다. 신사의 얼굴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 신사는 곧 이삭이다. 이삭의 꿈에서 보이는 일련의 상징, 공간, 상황들은 라깡의 해석과 일치한다. 라깡은 꿈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현실의 공간이라 주장했다. 이삭이 처음 의사로 개업했고 지금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의 주유소에서 중얼거린다. “여기에 머물 걸 그랬군” 이 고장에서 자신은 성실하며 나무랄 데 없이 존경하고픈 사람으로 여겨진다.
꿈은 감정의 억눌림, 냉혹함, 이기심으로 가득한 본 모습으로부터 도피한 공간이다. 중얼거림 뒤에 이삭은 마리안느의 꿰뚫어보는 듯한 눈을 피한다. 마리안느의 눈동자는 꿈이며 진실을 알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삭의 ‘여행’은 꿈으로의 여행과 현실에서의 여행, 두 가지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이삭에게 꿈으로의 여행은 내면의 문을 닫고 혼자만의 논리와 고집 속에 살았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의식이며 그러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사라는 이삭에게 너의 본모습을 보라며 거울을 들이민다. 이삭의 부인, 카린은 이삭을 냉혹함 무관심 등의 죄로 고소하며, 알만은 ‘당신은 용서를 구하는 법을 모른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이삭은 타인의 평가를 받아들이고 공허와 외로움에 젖는다.
<산딸기>에서 꿈은 억눌린 무의식을 대면하는 공간임과 동시에 현실의 확장을 동반한다. 현실의 확장이란, 곧 타인의 세계를 보고 듣고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꿈속에서 이삭은 문틈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이삭이 룬트에 도착했을 때, 이삭의 방문은 열려있다. 이삭은 가정부에게 ‘허물’없이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또한 이삭은 아들 에발트와 마리안느가 생각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말을 비로소 ‘듣기’ 시작한다. 여기서 ‘듣기’는 청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는 의지이다. 쌍둥이는 청력이 약한 삼촌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삼촌에겐 타인의 말을 들으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꿈이고, 영화는 음악이다. 그 어떤 형태의 예술도 영화처럼 우리의 의식을 뛰어넘진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들로, 저 깊숙한 곳에 있는 영혼의 어슴푸레한 방으로 곧장 들어간다.”
꿈과 영화는 억눌린 자신과 대면하는 하나의 의식이며 세계의 확장이다. 이삭은 ‘꿈’을 통해, 베리만은 ‘영화’를 통해, 이를 실현한다.
영화 <산딸기> wild strawberries. 1957. 감독 잉마르 베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