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다시쓰기 3 - 「그놈 목소리」, 생명은 평등하다
* 영화 「그놈 목소리」를 모티프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상가 세탁소에 걸려있던 고려대학교 과잠을 보며, 그 옷을 입었을 형호의 성장기를 생각했다. 좋은 부모 좋은 환경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고물을 싣고 다니는 노인 같은 부류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삼호선 압구정역 자동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고, 주일에는 부와 명예를 거룩하게 쌓아간다는 소망교회의 중고등부에 꾸준히 출석하던 형호.
시험이 끝나는 날 팔학군 명문 고등학교의 교문이 일제히 열리면 형호는 청담동 명품거리에서 친구들과 간단히 쇼핑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보내러 집으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압구정 현대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푸짐하게 장을 본 재료로 저녁 준비를 하시고 아버지가 다섯 시 반에 경비원에게 검정 독일차를 발레파킹 시키고 퇴근하시면, 영원히 붕괴되지 않는 콘크리트 성벽 칠십육 동 십오층 사호 팔십 평형대의 아늑한 집에 온기가 돈다.
그랬던 형호의 고려대학교 과잠은 왜 세탁소 진열대에 걸려있었을까. 튼튼한 콘크리트 집안에서 튼튼한 콘크리트 대학문을 세습받는 건 매우도 당연하여, 이제 공부는 손을 놓은 지 오래되었고 어제는 압구정 로데오거리에 있는 지상낙원이라는 술집에서 교우들과 밤새 고기와 술을 먹고 마셨다고 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형호와 교우들은, 자 우리 이제 자유와 진리와 정의의 참뜻을 논해보자, 세상의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도 우리 대학의 교훈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우리 자식들에게도 대대손손 물려줘야지, 하며 웅장한 건배사를 외쳤다. 거룩한 콘크리트 성전 안에서 배웠던 자유와 진리와 정의의 교리가 형호가 사는 콘크리트 여리고 성벽 바깥으로 젖과 꿀이 흐르듯 질질 넘치고, 잔들이 끈적하게 넘칠수록 대학의 교훈이 지방질처럼 둥둥 부유하는 고깃기름잔도 차고 흘렀다.
오토바이를 털털 몰던 고물상 할아버지도 어제 고깃집에서 버린 못 다 탄 철판들을 실었다는데, 형호의 고려대학교 과잠에선 오토바이 할아버지 옷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냄새가 났다.
오늘은 형호네 아버지의 퇴근이 좀 늦었다. 퇴근길 아파트 출입구를 통과하는 통로를 돌다가 좌회전하던 오토바이와 작은 접촉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거대한 쓰리윈드 독일차는 나치군의 전차 같아서 안타깝게도 앞 번호판만 약간 틀어졌고, 대신 오토바이가 조금 많이 박살 났다고 했다.
자유와 진리와 정의를 구현한다는 경찰이 왔고, 오토바이에 탔던 할아버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겨울나무처럼 서서 고개를 땅속 깊이 숙이고 있었고, 그러나 정수리에선 떡볶이 국물 같은 검은 피가 주저 없이 흐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죄스러워 그러는 건지 고통스러워 그러는 건지 얼굴이 피처럼 붉어지고 성냥팔이 소녀 같은 표정이 되어 자기 피보다 중요한 의미의 어떤 사과를 연거푸 아버지에게 바치고 있었다.
구급차가 멀리서부터 단조로운 소리를 내고 있는데 미국탱크 독일탱크 일본탱크 아무도 길을 터주지 않고 사이렌 소리는 삼십 년 전 형호가 죽었던 날의 색깔과 똑같은 색의 하늘 위로 자꾸만 올라가고 있었다.
오늘 우연히 압구정 현대아파트 상가 세탁소에 고려대학교 과잠이 걸려있는 걸 보았고, 우연히 티브이를 돌리다 영화 「그놈 목소리」를 보았으며, 우연히 삼호선 압구정역 통로에서 카드가 인식되지 않아 개찰구를 통과하지 못했고, 또 우연히 소망교회를 전 대통령이 장로로 있었다는 그 소망교회인지 모르고 지나쳤고, 우연히 어떤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뒤 검붉은 떡볶이를 먹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