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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름 Feb 05. 2020

탈린에서 먹고 마시기

@Tallinn, Estonia


순록 고기와 허니다크비어, Olde Hansa

 

날씨가 엄청나게 좋은, 오후의 광장
노점상에서 파는 볶은 아몬드

광장 쪽에 식당이 몰려있는데, 테라스에 앉아 낮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 곳에서 꼭 마셔보고 싶은 맥주가 있어서 아주 오랜만에 낮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탈린 명물이라는 볶은 아몬드 노점상을 발견했다. 한 봉지에 4유로라니, 비싸서 시식용 한 개만 맛봤는데 텁텁하고 맛있다.


@Olde Hansa Restoran, Tallinn

올드타운 자체가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곳이기 때문에 현지인 맛집 개념의 식당은 찾기가 어려웠고, 포털 검색하면 뜨는 식당들을 훑어보고 구글맵에서 내부사진이랑 맛 평가가 괜찮은 곳으로 정해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대낮부터 맥주를 즐기고 있다.

1층은 꽤나 시끌시끌해서 밥 먹는 분위기보다는 맥주에 안주를 곁들이는 분위기였다. 식사를 한다고 하니, 귀여운 중세시대 옷을 유니폼으로 입은 직원이 2층으로 안내해주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2층은
전기불 없이 초로만 밝혀 꽤나 어둡다.

식당 자체가 중세시대 컨셉인만큼 인테리어, 소품, 식기, 직원 유니폼까지 다 중세시대 풍이 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전기불이 아예 없다는 것이었는데, 1층은 그래도 자연광이 많이 들어왔는데 2층은 많이 어두웠다. 식사를 하기에는 많이 어두운데 괜찮으려나 싶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밥을 먹어보겠나 싶기도 했다. 참고로 사진은 최대한 밝게 찍은 것이다.


중세시대 느낌 물씬 나는 메뉴판

해리포터가 떠오르는 메뉴판 폰트와 그려진 문양들이 하나하나 신경 많이 썼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아주 치밀하지는 않지만 어느 하나 겉돌지 않게 다른 시대의 컨셉을 구현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야생곰 소시지라니.

북유럽에서 순록 고기나 곰고기를 먹는다는 얘기를 듣고, 맛있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근육이 많은 야생동물이니 분명 질기고 퍽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육질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스테이크보다는 소시지나 통조림으로 가공해서 먹는다고 한다. 순록 고기는 꼭 먹어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순록 고기 스테이크 세트와 맥주를 한 잔 주문했다.


순록 고기와 허니다크비어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비주얼이었다. 순록 고기 스테이크 세 덩이에 감자, 야채볶음 등이 한 접시에 담겨 나왔고, 허니다크비어는 투박한 도자기 물병 같은 곳에 나왔다. 맛을 평가하자면, 생각보다 괜찮은데 질기긴 질기다-정도랄까.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함께 있다면 굳이 골라서 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리고 허니다크비어는 말 그대로 달짝지근한 흑맥주 맛. 첫맛은 달지만 끝 맛은 약간 떫은 듯한, 그런 맛이었다. 홀짝홀짝 계속 마시다 보니 어느새 취하고 있었다. 식당이 어두운 것도, 감기 기운이 남아있는 것도 한몫했다.


Olde Hansa Restoran

Vana turg 1, 10146 Tallinn, Estonia

https://www.oldehansa.ee/


식당에서 얼굴 빨개져서 나오는데 날이 너무 밝으니, 괜히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최대한 똑바로 걸으려고 하는데 뭔가 비틀대는 것 같고, 누가 봐도 취한 사람같이 보일 것 같아서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졌다. 올드타운도 다 둘러봤고, 기념품도 샀고, 밥도 먹었으니 제일 빠른 배를 타면 되겠다는 생각에 선착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한 번 위기가 왔는데, 약 20분을 걸어서 간 선착장에서 표 변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배가 다 만석이기 때문에 시간 변경이 어렵다는 것. 잠시 멘붕이 와서 벤치에 널브러져 있다가 커피라도 마시면서 시간을 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20분을 걸어 올드타운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엄청 부끄럽다.


누군가 당일치기로 탈린에 간다고 한다면, 들어가는 배와 나오는 배 시간 텀이 12시간이 아니라 8시간 정도로 잡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디저트가 매력적인 Must Puddel

 

올드타운 같지 않은 골목
벽돌벽과 조명, 그리고 화분들. 마음에 든다.

다시 올드타운으로 돌아간 덕에 괜찮은 카페를 발견했다. 올드타운 답지 않게 현대적이라 이태원이나 한남동을 떠올리게 하는 골목에 있는 Must Puudel이란 카페에 들어갔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깊고 넓었다. 'Tohuvabohu'라는 단어가 조명으로 달려있었는데, 너무 크게 되어있어서 카페 이름인 줄 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황량하고 야생적'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곳곳에 걸려있는,
귀여운 일러스트들.

올드타운을 찾은 관광객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노트북을 가지고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는, 학생으로 보이는 어려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다였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작업하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조금씩 술도 깨는 느낌이었다. 직원이 추천해준 디저트와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진짜 맛있었던 디저트, 이름은 모른다.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디저트였다. 원목 도마 위에 대각선으로 견과류와 치즈, 각종 베리, 그리고 방울토마토가 늘어져있고, 석류가 올라간 크렘 브륄레와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는 새콤한 소스 같은 것이 함께였다. 전체적으로 새콤한 맛이었는데, 다양한 식감을 차례로 맛보다 보니 진짜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다시 가서 먹어보고 싶은데, 남아 있으려나.


Must Puudel

Müürivahe Tänav 20, 10140 Tallinn, Estonia

https://m.facebook.com/mustpuudel/


배에 올라타 있던 시간까지 합치면, 딱 12시간 동안 탈린에 다녀온 것이 된다. 올드타운만 둘러본다면 부지런히 다 둘러봐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에, 오전에 가서 늦은 오후 정도에 돌아오면 충분할 것 같다. 헬싱키나 스톡홀름 여행을 할 때 꼭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다시 가고 싶다.


아 그리고 하나 더. 탈린을 오가는 여객선 내에서 면세 쇼핑을 할 수 있는데, 면세율이 세계 최고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류를 카트에 가득 실어갈 정도로 많이 사는데, 나는 화장품 쇼핑으로 만족했다. 순록 고기와 곰 통조림은 하나 정도 사고 싶었지만 크기에 비해 비싼 것 같아 내려놨었고, 뒤늦게 또 후회했다. 여행지에 가서 살까 말까 고민되는 것은 무조건 사는 걸로 해야겠다.


다시 쌀쌀하고 흐린, 해가 지지 않는 헬싱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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