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는 게 지칠 때
도돌이표 :||
어린 시절 동네에서 제일 친했던 경림언니와 나는 함께 옆동네와 우리 동네의 경계쯤 언덕에 있는 샬롬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나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핑계와 피아노가 지겨워진 이유로 더 이상 배우지 않았는데, 언니는 그 후로도 꾸준히 한 우물을 파서 지금은 민 음악학원 원장 선생님이 되었다.
여섯 살 때부터 아홉 살 때 까지니까 대략 3년, 바이엘 상에서 시작해 체르니 30번 도중에 그만두었는데,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위대한 음악가의 이름이 붙은 독방에서 가만히 앉아 같은 부분을 10번씩 연주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좀이 쑤시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어려운 미션이었다. 솔직히 하농 같은 건 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음표인지, 음표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에게 선언을 하게 되었다. "엄마 나 피아노 학원 그만 다닐래." 근데 더 놀라운 건 "그래, 그러려무나." 하고 세상 쿨하게 허락을 하셨다는 거다. 우리 엄마는 나를 존종했던 건지 나에게서 싹을 보지 못하셨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우리 엄마가 나를 그렇게 쉽게 포기하도록 방치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다 더 쿨할 수는 없었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 악보를 보는 나는 가나다도 모르는 문맹과 다름이 없고, 3년 가까이 피아노를 배운 인간이 치기엔 너무나 수준 낮은 비루한 연주 실력이라(사실 안 배운 거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 돈도 아까울뿐더러 부끄러움은 덤으로 얻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도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은 남아있는데, 요즘 그때 배운 용어가 하나 계속 맴돈다.
"도돌이표".
동음, 동음형, 또는 동일 마디의 반복을 지시하는 반복 기호를 말하며, 영어로는 repeat signs, 한자로는 反復記號(반복 기호) 요즘 내 생활의 퀘스트를 쳐내다 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다. (모든 회사원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요즘 회의를 들어가면 반복되는 상황이나 대화, 보고서의 토시가 참으로 도돌이표 같다는 생각이 스칠 때, 특히 닥터 스트레인지가 도르마무에게 거래를 하러 가는 장면의 반복처럼 매일이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어라? 이거 꿈인가 어제 보고하러 들어갔을 때 나눴던 대화 아닌가? 하는 소름 돋는 찰나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기시감이. 모두 이 한 단어 "도돌이표"를 가리킨다. 화면에서 시야는 멀어지고 나는 점점 작아지면서 귀가 왱하고 머리가 아찔해지는 회의실에서의 멍 때림 소환사(또는 내 에너지를 좀먹는 에너지 뱀파이어)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도돌이표 도돌이표 도돌이표를 되뇐다. 혼란한 문양에서 매직아이로 떠오르는 글자를 찾아내듯 열심으로. 도. 돌. 이. 표. 이제 그만 집에 갑시다.
#일개미의고해성사 #여의섬라이프 #일개미의직장생활 #타임푸어의조직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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