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nghyun Kim Jun 23. 2020

여름 냄새

그 해 여름의 기억

나는 더위를 많이 탄다. 더운 날씨에는 조금만 걸어도 땀 범벅이 된다. 타고나기를 여름이랑은 잘 맞을 수가 없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밤꽃 향기를 동반한 선선한 여름 밤은 설레는 마음이 들게 한다. 여름 밤은 바캉스, 바다, 밤, 아름다운 장소들, 술과 자유로움 등에 대한 기억을 자극시킨다. 돌이켜보면 1년 중 가장 자유롭고 행복했던 사건과 시간들은 대부분 여름이었다.

올해 여름은 이제 시작이지만 특별함을 만들기에는 제약이 많을 것 같아서, 지난 여름에 대한 기록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그래서 '2015년 여름'부터 쓰다가 지웠다. 나에게는 이 새벽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고, 너무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새벽 시간이 여유로워서 내 멋대로 허비하다가 해가 뜨고서야 침대에 눕던 자유도 그립다. 내가 기억하는 연도별 여름들에 대해서 차라리 한 편씩 따로 써야겠다.


그래도 이 새벽에 가장 생각나는 2018년 여름의 제주도 사진은 몇 장 올리고 자야겠다.

제주에서 지낼 곳을 선정할 때 나의 기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치다. 정확히는 심심하면 슬리퍼 끌고 나가서 바다를 볼 수 있는지 여부다. 그런 의미에서 방에서 눈뜨면 성산일출봉과 바다를 볼 수 있는 이곳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3주의 시간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감동의 연속이었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해가 뜰 때나, 떠 있을 때나, 질 때나 시시때때로 변하는 매력적인 풍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렇게 멋스러운 광경을 앞에 두면 시시콜콜하고 답답한 고민들은 생각이 날 틈이 없다. 그저 일어나서 감상하고, 산책하면서 감상하고, 술 마시면서 감상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있을 뿐이다.

이곳은 쉬는 날 여러차례 방문한 게스트하우스다. 사람들이 걸터 앉고 술도 마시는 베란다 비스무리한 난간에서 찍은 건데 보다시피 풍경이 예술이다. 바로 앞 바다에는 언제든지 그냥 입수하면 된다. 노을 사진을 찍을 때는 누군가 오혁의 소녀를 틀었었는데 저 풍경이랑 노래가 조화로워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곳은 체크인도 체크아웃도 없다. 평상에서 뒤엉켜 자는 것(여성 방은 따로 있다)외에는 달리 규칙이 없다.

하루 비용을 내면 밥도 술도 알아서 먹으면 된다. 대부분은 낮부터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른다. 포털 사이트에 치면 '자유로운 영혼들의 개미지옥'이라는 설명이 뜬다. 그래서 장기투숙객, 다른 말로는 히피 혹은 한량들이 많다. 대부분은 30대 초중반이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첫 방문에는 당황스럽다. 저때는 저기서 보낸 시간들이 너무 좋았는데, 지금은 다시 방문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양말은 거의 안 신은 것 같다. 발에게도 해방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샌들, 슬리퍼와 아쿠아슈즈를 신고 잘 돌아다녔다.

저날은 계획없이 아무 버스나 타고 마음에 드는 정류장에 내려서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탄 버스가 한라산 등산로 입구를 지나갔는데, 그냥 내려버렸다. 솔직히 제대로 올라가기보다는 대충 산책이나 하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나, 슬리퍼 신고 한라산 갔다"고 친구들한테 자랑할 생각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직원이 신발 사서 다시 오라며 돌려보냈다. 근데 신발 신으면 발이 답답해 할 것 같아서 계획을 틀었다.

그렇게 아쉬운대로 사려니 숲길에 갔는데 무척 좋았다. 온통 초록색이었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혼자서 여유를 만끽하며 오래 걸었다. 사진은 지나가던 이탈리안 커플이 찍어줬는데,  초록색 좋아하는 여자친구를 만나면 꼭 같이 사려니 숲길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쓰다보니까 생각보다 길어졌다. 두서 없는 회고록이 된 것 같은데, 사진첩도 찾아가면서 추억여행하느라 시간도 늦었다. 곧 출근하는데 망했다는 이야기다.


여름 입구에서 한 가지 다짐하자면, 올 여름도 나중에 기억하고 싶을만큼 특별하게 보내야겠다. 생각해보니까 공간과 시간적 제약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진 않은 것 같다.

"누구랑 함께하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더 힘이 쎈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 2020년 여름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연결과 단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