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좀 더 손해보고 양보하는 삶
예전부터 아빠는 항상 본인이 좀 더 희생하고, 덜 가져가는 게 마음 편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디카가 득세하던 시절, 필름 카메라 현상을 하는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시며, 하루에 손님이 3명도 오지 않았을 때도 정성을 다해 손님의 사진을 현상해주시며 적정가보다 항상 가겪을 깎아주셨다. 그런 아빠의 모습에 엄마는 답답해했지만, 엄마에게 혼나면서도 아버지는 ‘그래도 자주 찾아오는 분들인데, 돈도 없는 학생들일 텐데 고맙잖아.’라며 멋쩍게 웃곤 했다.
더 이상 임대료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사진관을 접고 수입이 끊겼을 때도 아빠는 나와 동생에게 티를 내지 않으셨다. 다만 네 식구가 매번 함께 아침 식사를 했지만, 아버지가 일용직을 시작하시면서 엄마와 나, 동생만 아침을 먹게 됐다.
돌이켜보면, 한 번씩 아빠의 등에 파스를 붙여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주말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등산을 가거나, 근교 드라이브를 가며 가족과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빠가 잠이 좀 더 많아졌고 얼굴주름이 예전보다 깊게 패였던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최대한 들어주려 하셨던 것 같다. 금전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같이 있는 시간에 함께 농구를 하러 가거나, 슈팅연습을 할 때 기꺼이 골키퍼가 되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슈팅에 엄치를 척 올리며 씩 웃어주셨다.
예전부터 아빠는 항상 그랬다. 소도시에서 꽤나 큰 프랜차이즈 빵집을 할 때, 후줄근한 차림으로 빵집에 들어와 빵 몇 개를 손에 움켜쥐고 뛰어나가는 형들을 보고 엄마는 분해했고, 본 때를 보여줘야 된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 우리가 더 열심히 장사하면 되지.’라며 웃었던 기억. 지금 돌이켜봐도 마음이 참 크고 따뜻하며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난다.
모질지 못했고, 본인의 몫을 기꺼이 챙기지 못하는 성향. 집안형편이 어려웠을 때 아빠를 굉장히 많이 원망했었다. 그러나 지금 서른이 넘은 시점에 돌이켜보니, 내가 아빠의 성향을 많이 닮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돈보다는 사람, 경쟁보다는 화합, 내 몫을 확실히 챙기기보다는 그 사람이 자신의 몫을 챙겨서 만족한다면, 오히려 내 마음도 편하다.
강의를 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커리큘럼에 없는 것들도 많이 주는 편이다.
그런 소리를 종종 듣는다.
‘민창님은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본인의 역량을 크게 많이 못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다양한 것들을 다 돈으로 바꿔야 하고, 큰 돈을 받고 진행해야 가치가 올라간다는 소리도 수 없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한다면 누군가가 나를 만날 때 큰 부담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때로는 부담 없이 슬리퍼를 신고 동네에서 치킨에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동네 형, 오빠가 되고 싶고 두서없는 고민 상담에도 눈을 마주치고 정성스레 들어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빠처럼 내가 좀 더 손해보고, 내가 좀 더 양보하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며, 사람들이 나를 떠올렸을 때, 흐뭇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