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 년이 지난 일이다. 서른 살이 되기 전 부리나케 뛰쳐나갔던 여행 말이다. 지금에 와서 다시 그 일에 대해 끄적이는 이유는 글을 쓰기 위해서다. 물론 지난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없을 리는 없겠지. 예전처럼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지금의 답답함도 없을 리가 없다. 다만 그런 감정마저 모두어서 글로 정리하고 싶다. 지난 시간 내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막연하게 놓아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모습의 결정적 단초인 십 년 전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중국 윈난성에서 시작한 여행은 네팔을 거쳐 인도에 다다랐다. 이십 대의 많은 시간을 인도와 잇대어 보냈지만, 이번 인도는 다르다. 그저 파키스탄에 가기 위한 땅길로 선택했을 뿐이다. 마음처럼 돈도 있었다면 비행기로 지나쳤을 소나울리 국경을 넘어 바라나시, 뉴델리를 거쳐 파키스탄 라호르와 맞대고 있는 암리차르에 도착했다. 여느 인도의 도시답게 역 안팎은 무척 혼란스럽다. 터번을 두른 시크교인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오토릭샤에 탔다. 힌두교인보다 믿음직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없는지 그는 내가 묵을 낡은 게스트하우스 앞에 도착하자 웃돈을 요구했다.
암리차르는 시크교의 성지이자 총본산이다. 네모반듯한 커다란 호수 한가운데 눈부시게 반짝이는 황금사원이 놓여 있고, 그 둘레를 순백의 높은 성곽과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황금사원 안에는 시크교의 경전을 보관하고 있는데, 순례자는 교량을 건너 이곳에 다다를 수 있다. 나는 호수의 둘레를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탑돌이 하듯 황금사원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이들로 회랑은 기다란 사람띠를 이룬다. 이들은 위엄 있지만 정숙하지만은 않다. 예배와 기도가 삶이 되었다면, 안방과 성소에서의 모습이 다르지 않겠지. 이들은 기도하다 웃고, 떠들다가 기도한다.
거룩함이 소란 가운데 있다. 예배자와 기도자도 이 소란 안에 머문다. 나는 호수 가장자리에 몸을 담그고 기도하는 이와 적잖은 거리를 두고서, 그늘진 곳에 엉덩이를 대고 담소를 나누는 이들 곁에 앉는다. 어떤 기도를 하고 있을까? 귀에 울리는 제법 흥미로운 듯한 대화보다 알 수 없는 내밀한 목소리를 엿듣고 싶다. 그는 오랫동안 호수 안에 머물렀다. 황금빛의 찬연한 아름다움도 그의 감긴 두 눈을 뜨게 하지 못했고,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우여곡절 이야기도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는 홀로 그렇게 한참을 잔잔한 호수 안에, 그의 신 안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