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천재였습니다. 젓가락질을 배운지 이틀 만에 했고요. 유치원 때 경기도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탔고요. 초등학교 때, 반 대표 계주를 뛰었고요. 과학의 날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의 글 실력이 있었고요. 그림도 꽤나 잘 그렸습니다. 특히 농구를 잘했습니다. 학교 대표로 시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아무 이유 없이도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왼손잡이’로 타고났죠. 그래서 제 이름을 써야 할 때면 늘 이름 앞에 ‘천재’를 붙였습니다. 초등학생 때, 중간고사 시험지에도 이름을 천재라고 쓸 정도였죠.
그래서 교무실에 불려 간 적이 있습니다. “너 왜 시험지에 장난쳤어? 이름을 똑바로 써야지” 선생님은 이름에 ‘천재’라고 쓴 게 장난인 줄 아셨나 봅니다. 그땐 선생님의 야단에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장난이 아니었다고. 그 정도로 진심으로 스스로 천재라 믿었습니다. 자신감이 넘쳤고요.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죠. 그런데 왜 그랬느냐고요?
이건 다 만화 ‘슬램덩크’ 때문입니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말하거든요. 만화 속 캐릭터 중에서 가장 초짜이고요. 농구 실력은 거의 없는데도 늘 “나는 천재니까”라고 외치는 모습이 ‘희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의 자신감에 매료된 것이죠. 강백호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나 또한 그 존재처럼 되고 싶다는 동경도 포함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고, 군 제대를 하고, 직장인이 되면서 그 생각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2023년 1월,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습니다.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을 맡았는데요. 90년대에 봤던 만화가 영화로 돌아온 겁니다. 약 30년 만에 “물론, 난 천재니까”라는 강백호의 대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기쁨을 품고 영화관에 갔습니다. 어린 시절 저를 천재로 살게 해줬던 작품인 만큼 애틋함도 컸습니다. 보통 영화관에 가기 전에 해당 영화에 관해 공부하고 가는 편인데요.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배경지식이 방대하게 머릿속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극장에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주인공이 강백호에서 송태섭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태섭은 원작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입니다. 강백호를 비롯해 같은 팀 내에서 눈에 띄게 뛰어나지 않습니다. 주장인 채치수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 않고요. 강백호처럼 리바운드를 잘하지 않고, 정대만처럼 3점슛을 잘 던지지 않고, 서태웅에 비하면 여러 방면에서 부족하죠. '포인트 가드'라는 포지션을 고려해도 빼어난 기술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도내 최고의 피지컬을 가진 해남의 이정환, 전국 최강 산왕의 이명헌, 감독 역할까지 가능한 김수겸 등과 비교하면 송태섭은 특출나지 않습니다.
정대만도, 서태웅도 아닌 송태섭이 주인공이라니.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강백호에서 송태섭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슬램덩크’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 된 겁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강백호의 시선과, 비록 능력은 부족하지만 화려하고 뛰어난 팀원을 지켜보는 송태섭의 시선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동질감이 어떤 감정인지 원작을 다시 살펴봤는데요.
천재적 능력을 갖춘 캐릭터가 아닌 평범한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 눈길이 간 캐릭터는 ‘안경 선배’라 불리는 권준호였습니다. 북산고의 벤치를 지키는 선배이자 선발로 뛰지 못하는 식스맨이죠. 송태섭보다 비중이 더 작은 인물입니다. 농구로 미래를 그리기 어려운 수준의 실력이고요. 후배들에게 밀려 출전 기회도 많지 않습니다. 천재와는 거리가 멀죠.
하지만 팀을 지탱하는 선수라고 평가받습니다. 팀 감독 ‘안 선생님’은 권준호를 “채치수와 함께 북산의 토대를 다진 선수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팀원들이 어려운 시기에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정대만이 불량학생이 되어 농구 코트로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싸움이 학교 측에 알려지면 대회 출전뿐만 아니라 농구부가 해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죠. 이때 권준호가 정대만을 말립니다. 정대만은 권준호를 계속 때리는데요.
권준호는 물러서지 않고 정대만이 얼마나 훌륭한 농구선수였는지 설명합니다. 그리고 정대만이 멋진 사람이었다는 걸 상기시킵니다. 그때 안 선생이 들어오고 정대만은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죠. 권준호는 북산에서 그런 존재입니다. 비록 농구 실력이 주요 5명보다 뛰어나진 않지만, 팀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죠. 북산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또, 천재가 아닌 평범한 선수는 변덕규입니다. 그는 능남고교 농구부 주장인데요. 북산과의 경기에서 자신은 덩치만 크고 실력이 부족한 존재라며 자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히며 멘탈이 흔들리죠. 그러나 경기 중 맞붙은 채치수를 보면서 생각을 바꿉니다. 팀 내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게 된 건데요. “나는 채치수가 될 수 없구나. 내가 30점, 40점을 낼 필요는 없다. 우리 팀에는 점수를 따낼 수 있는 녀석들이 있다”라며 이렇게 말하죠.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 조연이 되길 자처한 겁니다. 자신은 지지만 팀이 지지 않도록. 윤대협 같은 천재적인 동료가 주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인 셈이죠.
원작을 다시 보며 권준호와 변덕규가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강백호를 보던 저는 이제 권준호와 변덕규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영화 속 송태섭을 봤습니다. 송태섭에게 느낀 동질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송태섭의 창으로 천재들을 보는 일. 그리고 내 역할을 찾아가는 것. 여기서 느낀 것이었습니다. 권준호와 변덕규가 조연이 되길 자처한 이유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3040세대를 열광시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모두가 강백호였지만, 이제는 대부분 송태섭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및 사회생활을 겪으며 우리는 뛰어난 능력자들과 마주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알게 되죠. 영화는 천재는 아니지만, 자신의 위치를 찾아 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겁니다.
저는 이제 천재가 아닙니다. 젓가락질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걸 알고요. 반 대표 계주를 뛴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흔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왼손잡이는 그저 소수자일 뿐이죠. 이제 어디에도 천재라고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강백호가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송태섭으로 승리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모두가 천재 강백호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원작에서 변덕규가 능력이 부족하다며 자책하는 채치수에게 “넌 도미가 아니라 가자미다. 진흙투성이의 가자미”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모두가 도미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노우에 감독은 송태섭 관련 질문에 대해 “원작을 연재할 때 저는 20대였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시야가 넓어졌어요. 영화에 새로운 관점을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치관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도 됩니다. 그 사람 나름의 답이 있다면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