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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작가 Aug 13. 2021

거기 계신가요?

제 청원서 좀 읽어주세요!!

지난날 마음이 조금 힘들어서 신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그 내용을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신에게 접수한 청원서는 접수가 된 것이고 신은 "너의 뜻을 알겠다!!" 하셨다. 


이바는 예의 바르게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뭐라고?"

"우주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대체 왜 하게 됐느냐고? 넌 이 우주의 일부야, 리즈. 한 성분이라고. 따라서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에 참여하고 나아가 네 감정을 알릴 자격이 충분해. 그러니까 네 의견을 한번 털어놔봐. 자기 진술을 해 보라는 말이야. 날 믿어. 적어도 신이 고려는 해 볼 테니까."

"정말?"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정말이고 말고! 만약 네가 지금 당장 신에게 청원서를 쓸 수 있다면 뭐라고 쓸래?"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수첩을 꺼내 청원서를 적어 나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내가 쓴 청원서가 접수되었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날 새벽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으면서 바로 저 문구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뒤 하루를 보내고 너무 힘들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에게 청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거의 한탄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왜 이러냐고 나는 무엇이 되려고 그러느냐고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이다. 마음껏 투정을 부렸다. 나의 속 마음은 이랬다.


'듣던지 안 듣던지 하는 것은 신의 선택이겠지 어쨌든 신과 나 말고 누가 볼 것도 아닌데...'

 

그다음 날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불안과 걱정은 뜻밖의 일로 해소되었다. 내내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였기에 그 순간 신께서 내 청원서를 읽으셨다고 느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미 코로나 이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디 가서 교회 다닌다는 말을 꺼내기도 부끄러운 입장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지도 않고 찬송을 듣거나 부르지도 않는다. 가끔 남편에게 우리가 기독교인이 맞을까? 물어보면 연륜이 묻어나는 대답을 해준다. 


"당신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건 아니잖아? 그럼 기독교인이 맞는 거야!"


그는 나보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지 훨씬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렇고 믿음은 나보다 남편 쪽이 훨씬 좋았다. 그는 교회에 모임을 이끄는 리더였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고 활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지금도 믿음은 나보다 확고하리라 생각이 든다. 나는 갈대와 같이 자주 흔들린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책을 읽는 것보다는 좋은 강의를 듣고 다른 책들을 탐독하는 것을 더 즐긴다. 심지어 그런 일들을 할 때마다 내가 주일마다 교회에 묶여있었다면 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문학과 시가 주는 즐거움을 누렸고 거기에서 평안을 찾았다. 온라인 독서모임을 하면서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어떤 마음이 동했는지 신에게 청원서를 썼고 그것을 신이 받아들였다.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 역시 책 덕분이었다. 


나는 7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마음이 몹시 힘들었고 계속 참여하고 있었던 독서 모임에서 마침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 책이다) 마침 청원서에 대한 문장이 내 마음에 남았고 며칠 뒤 나에게 큰 문제가 터졌던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청원서를 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에게 투정 따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중간에 일이 어떻게 해결이 되었든 그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은 나에게 운명을 선물해 주었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신은 책이 아닐까? 신은 언제나 거기에 머물러 내가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고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종종 부모님을 피해 도망 다니긴 했지만) 신을 단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배롱나무를 볼 때, 책의 좋은 문장을 만날 때, 독서모임에서 좋은 인연들을 만날 때 


'아! 신은 여기에 있어!' 


라고 느낄 수 있는 신이 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앉아서 글을 쓰면서도 아이와 깔깔거리며 농담할 때도 남편과 진중한 대화를 할 때도 그 모든 곳에 신이 함께 있다는 것을 종종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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