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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작가 Aug 03. 2022

첫 잔

내가 숨 쉬는 시간

8월 1일 밤 나는 동네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다가 사온 대용량 유리잔에 맥주 500ml를 가득 부어 천천히 마셨다. 연일 비가 오다 말다 하는 습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새로 사 온 잔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유리잔은 원래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이 잔을 샀던 날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은 아이 태권도 방학이어서 영어학원만 다녀오면 되는 날이었다. 통학 차량이 없는 학원이라 직접 데려다주고 수업이 마치면 데려와야 했다. 학원이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어 아이가 학원에 가 있는 동안에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끝나면 만나서 함께 올라오기로 했다. 다만 태권도 방학쯤엔 비가 내리지 않고 밖에 잠깐만 나가도 뜨거운 열기와 더위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아이와 함께 걸어서 학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마침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온 남편에게 갈 때만이라도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처음엔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으나 밥을 먹고 난 뒤 몸이 노곤한 지 귀찮은 티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운전을 못하니 남편이 도와주길 바랬다. 태권도 방학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틀인데 마지못해 해 주는 척 가기 싫은 티를 내니 빈정 상해 그냥 걸어가겠다 하고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뜨거운 태양 볕이 내리쬐어 잠깐 걸었는데도 아이는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학원 건물 1층에 도착하고 보니 아이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고 지쳐 보였다. 아이를 보내고 나서 걱정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더위 때문에 너무 어지럽지 않을까?"

'시간에 딱 맞춰 왔는데 수업 전에 물은 마셨을까?'

'더워서 정신이 없을 텐데 수업은 잘 들을 수 있을까?'


멍하니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다 몸을 돌려 근처에 있는 카페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나 역시 더위 때문에 몹시 지쳐 있는 상태였다. 상한 마음과 힘든 몸을 달래 줄 무언가가 필요한 타이밍.

음료를 주문하고 받자마자 "이 컵이라도 사야겠어!" 하는 마음이 요동쳤다.


큰 잔에 얼음이 가득 채워져 있고 상큼한 자몽 음료와 말랑한 젤리가 함께 담겨 나왔다. 한 여름에 잘 어울리는 음료였고 꽤 괜찮은 유리잔이었다. 무엇보다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전환할 핑곗거리가 필요는데 음료는 너무 맛있었고 유리잔은 영롱해 보였다. 카페에서 마셨던 음료와 똑같이 집에서 마실 순 없겠으나 비슷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남편에게 통보하듯 유리잔을 사고야 말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남편은 내가 기분이 상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별 말을 하지 않고 허락을 해줬다.

매장에 재고가 없었고 본사에 주문을 넣어둔 뒤 나중에 찾아와야 했다. 카페를 찾아오는 손님 중 대용량 유리잔을 구매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한 쌍으로 두고 싶은 욕심도 들어 2개를 살까 했는데 그러기엔 유리잔의 가격이 저렴하진 않았다. 왠지 과소비하는 느낌이 들어 일단 1개만 주문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주문한 유리잔을 8월 1일 받게 된 것이다. 정신없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새로 사 온 유리잔을 뽀드득 소리가 나게 닦았다. 여름의 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밤이었다.

"맥주 한 잔 마셔야겠다!" 


워낙 큰 컵이라 맥주 500ml를 따르고도 꽉 차지 않았다. 


"맥주만 먹기 심심하니까!" 


과자 한 봉지를 꺼내왔다. 요즘 남편이 집 근처 슈퍼에서 옛날 과자 몇 개를 사 오는데 케첩을 찍어 먹으면 맥주와 아주 잘 어울리는 안줏거리다. '밤에 이렇게 먹으면 살찌는데.' 걱정을 하지만 이 '안 좋은 습관'은 나의 숨통이기도 하다. 아이 방학 시작과 동시에 아이 챙기기, 집안일 돌보기 그리고 내 일까지 더해 시간에 쫓겨 우왕좌왕할 때가 많다. 아이의 여름 방학은 긴 것 같아 보이지만 찰나에 지나가는 것처럼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은 매우 짧고 아쉽기만 하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느라 고생했다! 이제는 숨좀 쉬어라 하는 시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다. 술을 조금씩 즐기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가 시작될 때부터였다. 그 시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식구들과 복작이는 시간이 괴롭기만 했다. 마음을 달래려고 맥주 한두 잔 마시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마신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뜩 멍해질 때가 있다. 내 안에 열기를 조금 식혀주고 쉬어야 할 타이밍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꺼내 읽었다. 꺼내 놓은 책 제목이 [매일매일 채소롭게]인데 맥주에 과자를 먹으면서 채소 이야기라니 나도 참 웃기다. 한참 읽고 있는데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기 시작해 잠자리에 누웠던 아이가 벌떡 일어나 자기 방에서 안방으로 옮겨 간다. 종종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하는데 이제는 작은 덩치가 아니기 때문에 같이 자면 나는 침대 끝자락에서 붙어 자야 한다. 아이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 밤잠은 다 잤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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