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의 전당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공연 리뷰
비올라를 취미 삼아 꾸준히 연습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이번 공연을 관람했다.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와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협연했다. <한수진과 브리티시 오리지널> 공연 제목답게 영국음악이 중심이었다. 우연하게도 관람하기 며칠 전 다른 음악공연을 관람했었다. 현악기 중심인 연주자 5명으로 구성된 재즈공연이었다. 바이올린보다 첼로 소리를 좋아했던 내가 재즈공연을 통해 바이올린에 반했던 터였다. 이번 바이올리니스트는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지, 또 재즈와 비교해서 이런 대규모 오케스트라 공연은 어떤 점이 다를지 벌써부터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다.
공연은 주한영국대사 '콜린 크룩스'의 한국말 인사로 시작되었다. 그의 유려한 한국말 덕분에 엄숙했던 클래식 공연장이 다소 유연해졌다. 아버지도 우스갯소리로 자신보다 한국말을 더 잘 한다며 즐거워했다. 팸플릿에 친절히 적혀있던 곡 순서 덕분에 차근차근 관람할 수 있었다. 아직도 클래식 이라는 익숙지 않은 언어에 대한 어색함이 있었지만, 귀에 듣기 좋은 소리는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무나 황홀한 공연이었다.
공연은 분명 황홀했는데 감상을 적기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팸플릿에 적힌 정보, 곡에 대한 지식을 공부한다 한들 몇백 년의 세월이 담긴 곡에 대한 정확한 비평을 내릴 수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대신 내가 느낀 점, 한 가지만 붙잡자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은 과연 회화적이라는 사실이다. 며칠 전 재즈 공연을 보고 작성한 글의 제목은 ‘눈을 멀게 하고 싶은 충동’이었다. 시각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몸으로 인한 감각이 극대화된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회화적이고 시각적이었다. 어떤 이미지가 그려짐에 따라 다양한 사유가 붙었다.
음악이 내 귀에 닿는 물리적인 방식은 같았겠지만 재즈냐 클래식이냐에 따라 사용하는 기관이 달랐다. 깊은 직관보다는 사유나 감각을 사용하게 하는 면이 오히려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은 영화는 오래 곱씹어 볼 만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클래식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작곡가의 곡이고, 연주자는 누구이며, 어떤 악기가 사용되고, 또 편곡한 작곡가는 누구이고, 악보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등 끊임없이 해석할 거리가 붙는다. 다만 클래식은 ‘고전’이라고 하는 것을 후대의 음악가들이 재해석하기에 웬만한 클래식은 다 좋게 느껴지긴 한다. 물론 클래식 입문자인 내 경험에 한한 의견일 수 있지만. 그러나 적어도 공연장에 자주 올라오는 클래식은 몇백 년 간 꾸준히 인기 있어 온 ‘스테디 셀러’ 이지 않은가.
그래서 내 귀는 아직 더 훈련되어야 하겠지만, 이번 공연은 확실히 다르다고 느꼈다. 특히 오케스트라 소리가 이렇게 깔끔하고 지휘자의 손끝에서 정확히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게 ‘지휘를 정말 잘한다’라는 감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사실 영화에서의 ‘연출’이라는 것도 말로 설명하자면 정확히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촬영, 미술, 음향, 편집 등은 비교적 한 마디로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연출’은? 사람들에게 ‘연출이 잘 된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선뜻 꼽기 어려워한다.
‘지휘’도 비슷하다 생각했다. 수많은 유튜브 영상에서 보아 온 지휘자들, 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지만 잘한다, 못 한다에 대한 평가를 대중들이 쉽게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드리엘 김의 지휘를 통해 확실히 느꼈다. 좋은 지휘는 이런 것이었다. 무대 위의 지휘자나 연주자가 사라지는 음악. 마치 자연 안의 생물처럼 본래 태어나고 자란 자연스러움. 좋은 연기나 좋은 무용이나 좋은 예술은, 철저히 계산에 의해 작동되는 반복과 자연스러움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분명 연주자와 지휘자가 존재하지만 이 음악은 원래 이렇게 태어난 것 마냥, 인위적인 대상이 아닌 살아있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 데에는 단연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의 명연주가 있었다. 굉장히 해맑은 얼굴을 가진 그녀는 연주를 앞두고서는 태세부터 달라졌다. 이 무대가 마지막인 것처럼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활털이 막 빠지는데도 곡에 몰입하는 광경은 과히 장관이었다. 특히 막스 리히터의 ‘비발디 사계 리컴포즈드’를 연주할 때는 내가 다 숨이 차올랐다. 속주는 빠르게 연주하는 게 아니라 정박에 정확히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에 걸맞게 정확하게 그러나 자신만의 표현은 갖고가면서, 명연주는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넘어질까 두려워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음 위를 걷는다. 힘차게 한 번 걸었더니 미끄러져 넘어지고, 다시 얼음 위로 뛰어가지만 이번엔 얼음이 깨지고 무너진다. 굳게 닫힌 문을 향해 바람이 전쟁처럼 돌진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겨울이고, 또 겨울이 주는 즐거움 아닌가.
비발디가 <사계>의 겨울 3악장에 붙인 소네트이다. 아쉽게도 겨울 3악장은 공연에서 연주되지 않았지만, 다른 계절에도 위 내용처럼 소네트를 손수 썼다고 한다. 글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다 위 소네트를 발견했는데 소름이 쫙 돋았다. 단순히 음표들로 구성된 소리가 아니라 어떤 것에 영감을 받고, 어떻게 표현하며,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되는지 까지가 음악이었지. 다른 예술과 다를 바 없는, 관객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었지 하면서 말이다.
하이든 교향곡 92번 ‘옥스퍼드’, 에드워드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본 윌리엄스 ‘푸른 옷소매 주제에 의한 환상곡’, 본 윌리엄스 ‘종달새의 비상’, 막스 리히터 ‘비발디 사계 리컴포즈드’, 에릭 코츠 ‘런던 모음곡’. 이번 공연을 통해 알게 된 좋은 곡들이다.
평소 많이 들어봤던 작곡가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음악을 들으니 꼭 들어봤던 곡이었다. ‘어 어디선가 들어봤는데?’하는 곡이 대부분이었다. 유튜브 세상을 통해 예전보다는, 더 다양한 색깔 있는 연주자의 곡들도 쉽게 들을 수 있으니 꼭 검색해서 들어보기를 추천한다. 멀고도 가까운 당신, 클래식. 언젠가는 듣는 걸 넘어서서 연주해 보리라 생각도 갖게 되었다. 취미 한 가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연주를 하게 되면 듣는 귀도 더 발달하지 않을까. 부디 다음 클래식 공연에서는 조금 더 갖춰진 소양과 태도로 임해, 이 감동을 더 잘 전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