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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늘 Feb 11. 2024

눈을 멀게 하고 싶은 충동

[Review] 토마스 스트로넨<Time is A Blind Guide>

키가 족히 백구십은 되어 보이는 노르웨이 아저씨들이 한국 아주머님들과 손 하트를 주고받는 광경이라니. 공연이 끝난 후, 경기아트센터 소극장 앞 로비는 CD를 사려는 관객과 사인을 받으려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섰다. 공연시작 처음에 감돌았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도 CD를 사고, 사인을 받으러 줄을 섰다. 무슨 감정인지 마치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수줍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본채 사인만 받고 로비를 빠져나왔다.  


2월 3일 토요일,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토마스 스트로넨의 공연이 열렸다. 음악 하는 분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아티스트였는지, 사인을 주고받으면서 유창하게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나는 완전히 뉴비였다. 오롯이 ‘재즈’라는 단어 하나에 꽂혀서 공연을 관람했다. 물론, 포스터의 파도치는 사진도 마음에 들었다. 


공연 관람 후 받은 연주자들 싸인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맨 앞 열에 앉았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베이스, 드럼이 무대 위에 고요히 나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또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관객석의 불이 꺼지고 소곤거리는 소리, 기침 소리 등이 오갔다. 그러나 5~10분이 지나도 연주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공연사고 생긴 거 아니야? 생각할 찰나에 무대 뒤쪽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무대 위에 올라왔고 처음에는 그래서 좋게만 볼 수 없었다. 으레 공연장을 가면 느낄 수 있는 관객과 연주자 사이의 긴장의 줄다리기였을까? 


이들의 리더, 드럼을 맡은 토마스 스트로넨이 짤막하게 인사를 하고 연주를 시작했다. 관객으로 참여한 공연에서의 내 태도는 사실, 갑을관계로 따지면 을이었다. 왠지 모르게 전문가와 비전문가 관계라는 생각때문에 무대와 객석의 구분처럼,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위계를 지었다. 이를 부수기 위해 예습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갔을 때의 쾌감을 좋아한다. 사람을 처음 만날때도 조금이라도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가면, 상처는 비교적 덜 받긴 하지만. 나는 프레임을 씌우기를 원체 좋아하지 않는 터라, 새로움이라 생각되면 무방비 상태에서 도전한다. 이들과의 만남도 도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갑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손해 보기 싫어서이다. 즐기고 싶으면 그 마음을 내려놓으면 된다. 적어도 그 공연장 안에서는 나는 을이지만 그들에게 굴복했다. 놀이처럼 그들의 리드에 따라 움직였다. 이해해 보고자 어떻게든 다양한 지식을 떠올리고, 이성의 사고를 돌리고 관객으로서 나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들어오는 대로 맞아들였다. 처음의 설렘, 그리고 아쉬움 등의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나는 그들과 한 몸이 되었다. 누가 손해보느니 마느니 따위의 갑을관계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마치 섹스와 비슷했다. 어떻게든 다양한 지식을 동원해 상대방 취향을 이해하려 하고, 또 상대방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려는 마음. 그러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 마치 놀이처럼 각자의 호흡대로 상황을 즐기는 것, 무대위 연주자와 객석아래 관객과 호흡을 나누는 모습도 비슷했다. 


또 하나 비슷한 면모가 더 있다. 바로, 죽음 충동. 나는 이들 공연을 감상하며 절정에 다다랐을 때 내 눈을 멀게만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시각을 포기하면 내 귀에, 내 몸에 닿는 감각들이 더 미묘하게 잘 들리지 않을까. 최대한 이 감각을 끌어올리고 싶어 나는 내 눈을 찌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때로는 명치가 쑤시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또한 그런 죽음충동에 연장선상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공연 제목도, 'Time is A Blind Guide'였다. 시간은 보이지 않는 길. 오롯이 시간에 우리 몸을 맡기면 되었다.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안내할 따름이다. 그리고 시간은 연속적인 존재이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인간에게, 시간은 불가항력적인 대상이다. 음악은 그런 순간을 인간에게 선사한다. 불연속적인 존재인 인간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바로 음악 안에서 숨쉴 때였다. 음악을 감상할 때만큼은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음악은 여타장르와 완연히 다른 대상임을 깨달았다. 시작과 끝이 어떻든, 좋다고 느끼면 그게 다였다.


그리고 재즈라는 장르가 이런 감정을 더 극대화시키는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기본 코드 안에서 즉흥성을 겸비한 연주자들 간의, 관객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니까. 


무대공연이 끝난 후 - 아유미 타나카, 하콘 아쎄, 레오 스벤슨 샌더, 토마스 스트로넨, 올레 모르텐 바간 (왼쪽부터)


무대공연의 관람 횟수가 늘수록 감상을 어떻게 활자로 담을까, 매번 한계에 부딪혔다. 오롯이 그 자리에서 느꼈던 감정은 마치 기억처럼 사라지고, 또다시 재편집되었다. 이를 붙잡으려 음반을 사지만, 그때 그 자리에 앉았던 나와 그때 그 퍼포먼스를 펼쳤던 연주자 간의 호흡이 기록될 리는 만무하다.  


하, 매번 좋은 공연을 보면서도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이다. 더 잘 느끼게 될수록 더 잘 이야기하고 싶고, 더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정말 백문불여일견이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문화예술을 소개하고 싶어 어김없이 펜을 든다. 더 공부하고, 더 많이 써야 할 때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위로와 평화를 얻기 위해, 문화예술을 즐겼다. 하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고, 이를 마주할수록 쓰라릴 때도 너무 많았지만 내가 점점 입체적이 되어감을 느꼈다. 2차원에서 3차원이 되었고, 4차원이 되기 위해 더 다양한 문화예술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곤 했다. 사람과의 교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는 외로워서 사람을 사귀지만, 깊이 만날수록 모르는 감정을 발견하게 되고 내가 모르는 나의 모습도 마주하게 되니까 말이다. 


토마스 스트로넨의 이번 공연은 나에게 한 차원 다른 세계를 경험시켜 주었다. 눈을 멀게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 준 훌륭한 공연이었지만, 그들이 음악 밖으로, 현실로 나오면 그들 역시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수줍은 아저씨들일뿐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음악도 결국 나와 같은 인간이 연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왠지 모르게 몽글몽글해진다. 어쨌든 같은 인간 손에서 나온 연주인데,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게 뭐람! 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것 같다. 다같은 인간이 하는 짓이니까. 






출처 : https://www.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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