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예술을 해야하는가'로 전환하기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학과를 졸업한 필자이지만 학부시절 전공수업을 듣던 나에게 ‘예술’이란 매우 버거운 주제였다. ‘예술’이란 단어의 무게가 싫었고 허영심과 나르시시즘이 가득한 예술가들이 아니꼽게만 보였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보이는 예술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술은 사회에서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가? 가끔씩 그들이 벌이는 충격적인 퍼포먼스와 스타성을 가장한 화려한 외피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근 십 년 만에 일 학년 때 수강했던 ‘예술학입문’ 교재를 다시 펼쳤다. 신시아 프리랜드가 쓴『과연 그것이 미술일까? (But is it art?) 』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다. 스무 살 때는 그렇게 따분했던 책이 지금은 참으로 술술 읽히니 신기할 따름이다. 저자는 피와 오줌, 정액으로 제작한 작품을 언급하면서, 과거 아름답고 지적으로 고양된 것을 예술이라 이야기하던 때와 달리 지금의 예술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묻는다. 마르셀 뒤샹의 ‘샘’,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와 같은 작품으로 인해 예술의 개념이 확장됨에 따라 예술을 정의하는 과정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특히 충격과 논란을 야기하는 작품은 과연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지, 혹은 단순 주목받기 위해 예술의 껍데기를 이용하는 것인지 점점 확인하기가 어려워진다.
하지만 여기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미술계 내 논의는 잠시 뒤로 밀어놓고 우리 삶에서의 예술을 먼저 살펴보자. 몇십 년 전에 비해서는 예술은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듯하다. 관의 주도에 의해 예술은 점점 삶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고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술을 어렵게만 보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정보의 공유와 쌍방향 소통이 자유로운 시스템은 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낮추었다. 또한 예술에 대해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는 광범위해졌다. 예술의 정의는 확대되었으며 누구나 욕망에 따라 예술을 할 수 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은 이미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예견한 바 있다.
19세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각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단을 가지지 못했다. 단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유화나 캔버스와 같은 수단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회화적 표현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명으로 상황은 변했으며 누구나 시각예술가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카메라 산업과 미술시장의 규모는 벽에 걸린 한 점의 걸작을 바라보는 대신 작품을 창조하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을 반영한다. - 조정환, 전선자, 김진호, 『플럭서스 예술혁명』, 갈무리, 2011, p.229에서 재인용
예술은 이처럼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예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으레 그렇듯 효용성의 잣대에 따라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술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는 아직까지 지식계층의 유산처럼 고상하기에, 지금의 예술은 고급계층이 향유할 만한 이미지는 가져간 채 돈이 되는 방향, 즉 효용성이 있는 방향으로 재편집된다. 예술은 돈이 안 되므로 할 놈만 한다의 시대가 아닌, 예술은 돈이 되므로 누구나 예술을 한다의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아티스트 집단이 있다. 현재 국내 대림미술관에서 <MSCHF : NOTHING IS SACRED>의 전시를 열고 있는 ‘미스치프(MSCHF)'이다. '장난짓(mischief)’라는 이름처럼 그들은 사회 풍자적 의도를 지닌 유쾌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이 주목받은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가장 화두가 된 지점은 예술이라는 아이템으로 투자를 받고 자생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한 데 있을 것이다. 그들은 2주마다 작품을 생산하는데, 이를 그들 말로 drop 한다고 이야기한다.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하는 유튜브 이오(EO)에서 그들이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들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작품을 내놓는 이유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보여준다’라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하지, 최신의 작품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대림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의 양은 상당했다.
그러나 이상한 의문점이 들었다. 그들의 작품을 관람할수록 무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자꾸 돌고 도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아래는 미스치프 전시를 설명하는 문구이다.
본 전시는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과잉 생산되는 관심 경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며, 그에 걸맞은 창의성과 운동신경으로 무장한 미스치프의 고유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이러니한 세상을 보여준다.
빠른 속도로 과잉 생산되는 사회에서 단연 요구되는 덕목은 ‘실행력’이다. 미스치프의 CCO 중 한 명인 케빈은 변화하는 문화의 속도를 따라가야 하기에 자주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만들어야, 끊임없이 쏟아지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는다면서 말이다. 이는 관심경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즉 구조를 거부한다기보다는) 시대 그 자체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CEO인 가브리엘 역시 말한다. 투자받기 위해서 그가 하는 발표는 “올라타세요. 어디로든 갑니다”라고 말할 뿐이라고. (물론 약간의 유머가 섞여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타인터뷰에서 스스로 정의하기를 포기한다. 정확히 말하면, 정의하기를 회피한다. 그들은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낯설고 새로운 것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들은 돈을 위해서 예술을 한다. 그러나 이미 현대는 예술이 돈이 되는 시대이고, 이에 대해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마치 예술과 돈이 동일시되는 것을 콕 집어 말하기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미스치프는 스타트업처럼 상품을 빠르게 세상에 내놓고 돈이 될 만한 맥락을 짚어내 다시 예술을 생산해 낼 뿐이다.
기억에 남는 작품도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Medical Bill art>이다. 미국의 의료부채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해 예술품 경매 생태계를 이용한 작품이다. 의료비 청구서를 캔버스에 유화로 그린 뒤, 실제 청구된 비용과 동일한 금액으로 작품을 판매하고 그 수익금으로 빚을 상환한다.
또 하나는 <The blue donkey>라는 작품이다. <The blue donkey>는 특정 정치 후보를 위한 기부금을 받는 온라인 음식점 판매점이다. 일부 기업은 임직원에게 복지의 형태로 점심 식사나 식대를 제공한다. 이를 역이용해 미스치프는 여기서 식대를 사용하면 실제 음식을 받는 대신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 소프트와 같은 테크 대기업의 행보를 간섭하거나 반대하는 정치인들에게 기부금으로 전달된다. 개인이 기업의 혜택을 사용하여 기업의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 외에도 성수와 피를 넣은 신발,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명품가방, 대형 시리얼 한 개가 들어가 있는 시리얼 박스, 5000개의 자동차 키와 연결되어 누구나 몰 수 있는 차 등 다양한 작품이 있지만, 2주마다 drop 해야 하는 방식 때문인지 아이디어에 그친 작품이 많았다. 차라리 몇 개의 과정중심의 작품을 집중 있게 다뤘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공고히 함은 도망가는 게 아니다.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마치 그들조차도 자신이 없어서 ‘이거 보세요! 이렇게나 많이 했어요!’ 하는 느낌이었다. 혹은 ‘이렇게나 탈장르적으로 많은 예술을 할 수 있으니 주목해 주세요!’라는 느낌이랄까.
사실 예술과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백남준은 TV기술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대중이 좋아할 만한 방식으로 또 그만의 유희를 섞어 작품을 제작했다. 다만 백남준은 솔직했고 그의 지향점은 공고했다. 퍼포먼스든 기술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했지만 그의 작품이 바라보는 지점은 동일했다. 결국 예술은, 돈의 문제를 떠나서 태도의 일관성 문제이다. 예술가든 예술가집단이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냉정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므로.
현대 사회는 아이러니하다. 이런 아이러니함=미스치프 그 자체라면 성공한 것일 수도 있다.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구조를 이용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모순성을 풍자한 의도라면 미스치프 존재 자체가 증거이다. 구조를 타파하고자 했지만 구조에 기대게 되는 모순. 자가당착의 미스치프는 그래서 그들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망갈 구석을 남겨 놓기 위해. 그러나 둑을 높게 쌓는다고 해서 자연재해로 점점 높아지는 해일을 막을 수 없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돈으로 계속 둑을 높이 쌓을 수밖에 없고, 결국 그 안에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돈을 낸 내부자들일뿐이다.
다시 처음에 이야기했던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논의로 돌아와 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는 비단 미술계 안의 문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백남준이 예언했듯, 앞으로 모두가 예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되므로 누구나 예술을 한다는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예술은 돈이 안 될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즉, 숨 쉬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말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기댈 게 오롯이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핑계 댈 것도, 기댈 것도 없다. AI가 당연한 세상에서,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색을 멀리 한다면 우리의 뇌는 뒤죽박죽해지고 결국 정신적으로 고통만 받게 될 것이다. 과거 예술가들이 정신병을 얻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미래인은 정신병을 달고 살 것이며, 예술은 그래서 필요하다.
예술은 소수 지식인이 보유하는 유산도 아니며, 미래를 예견하는 전위적인 것도 아니다. 예술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인간 나 자신이고, 예술은 어찌 되었든 나의 신실함을 위해 쓰여야 한다. 끊임없이 넘어지고 까지고 다치고 또다시 일어서고, 정의하고 해체하고 또다시 정의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은 성과의 일관성을 지녀야 하는 게 아닌 태도의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예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신시아 프리랜드,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 전승보, 아트북스, 2011
조정환, 전선자, 김진호, 『플럭서스 예술혁명』, 갈무리, 2011
출처 : https://www.art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