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육아
출산을 한 달 남짓 앞둔 날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분위기를 잡으며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엄마는 나를 낳기 직전까지도 내가 딸인지 몰랐다고 한다. 성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만삭 때에도 딸인지, 아들인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산 당일, 의사 선생님은 갓 태어난 나를 엄마 품에 안겨준 뒤에야 딸이라고 알렸다. 엄마는 그 소리를 듣고 자꾸만 눈물이 났단다. 감격해서, 기뻐서, 고마워서 운 게 아니었다. 당신은 내가 딸이라서 울었단다. ‘내 딸도 30년 후엔 지금 이 고통을 겪겠지.’라는 무서운 생각이 먼저 들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엄마의 눈물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도 딸을 낳았다. 다행히 엄마가 우려했던 고통은 겪지 않았고, 불행히도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아보진 못했다. 엄마와 달랐던 짧은 출산 과정에서 나는 한 방울의 눈물만 짧게 떨궜다. 이는 엄마가 알려준 그 눈물과는 조금 달랐다. 확실히 기쁨이나 설렘에 가까웠다. 얼른 아기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엔 전혀 몰랐다. 엄마가 느꼈다던 그 눈물의 의미를. 오히려 딸아이와 동고동락을 시작한 뒤에야 조금씩 그 마음에 가닿을 수 있었다.
모두 잠든 고요한 새벽, 나는 막 수유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퀭한 눈으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는데 문득 차창에 30년 전 엄마의 얼굴이 스친다. 지금 나처럼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안고 새벽 어스름을 멍하니 보고 있는 엄마였다. 나는 지금 내 딸을 안고 있지만 30년 전 엄마가 나를 안고 있는 모습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30년 전의 나를 안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가 되고, 내 딸이 내가 되고, 내가 내 딸이 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한 이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문득 지금의 시간이 나만의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내 시간은 엄마가 살아온 시간에 겹쳐지고, 딸의 시간은 내 시간 속에서 함께 흐른다. 어쩌면 우리는 가늠할 수 없는 시공간 속에서 모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탯줄이라는 물리적 연결고리는 끊어졌지만, 우리는 시간으로 다시 이어지는 걸까.
엄마가 되고 난 뒤 내가 느끼는 시간은 4차원에 가까웠다. 시간은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뒤로도 갔고, 옆으로도 퍼졌다. 나는 바뀐 시간 속에서 나의 과거와 엄마의 과거를 만날 수 있었고, 동시에 엄마와 딸과 함께 지금의 시간을 공유하기도 했다. 시간의 영역은 전방위로 확장되어갔다. 내 시간은 엄마가 지나온 시간에까지 닿았고, 이제 갓 시작된 딸의 시간도 내 시간에 편입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니 엄마가 태어나기 전에도 수많은 봄이 피고 졌다. 나에게는 35번째, 엄마에게는 61번째 봄이지만 내 딸에게는 처음일 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번 봄이 기다려진다. 우리가 맞이할 첫봄의 순간에는 세 사람의 시간이 겹쳐질 것이다. 이 반복적이고 거대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함께한다. 옆에서 옆으로 퍼질 봄날의 시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