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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겔 Jan 11. 2021

일로서의 글쓰기

일상 에세이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너무 공감된 부분이 있었다.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쓸 때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좀 더 쓰고 싶어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잘 안 써진다고 해도 최대한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채우는 것이다.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라 했다.


나는 사실 글쓰기에 취미나 특기가 없다. 글을 잘 쓰지 못할뿐더러 글쓰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일’이 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생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는 일도 일처럼 하면 끝내 완성할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글쓰기를 일로 접근했다. 글쓰기 최종 목표를 책 출간으로 정하니 따라오는 액션플랜은 매일 일정 분량의 글을 만드는 일이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 일이 꽤 의미 있고 낭만적인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처럼 시작한 사람에게는 실제로 노동에 가까웠다. 정신노동뿐 아니라 육체노동이었다. 


나는 수험생활을 할 때처럼 절대적인 시간을 글쓰기에 투자했다.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처럼 9 to 6를 웬만하면 지켰다. 글은 카페에서만 써졌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공간을 몇 군데 골라 9시까지 출근했고,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엔 다른 카페로 가서 글을 이어 썼다. 심지어 글 작업 초반엔 스톱워치까지 들고 다니며 반복생활을 체화시켰고, 출석체크 스터디에도 참여해 정해진 시간에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간 일처럼 썼더니 책 한 권 분량의 글이 완성되었다. 


나는 글을 쓸 때 주제나 구조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글쓰기 초보자에겐 혹여 위험한 접근일 수 있지만 내겐 가장 편하고 익숙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전체적인 중심과 얼개를 잡고 가는 사람이 부럽긴 해도 나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 먼저다. 다 쓰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돌아가 조목조목 뜯어고치는데, 되는대로 쓴 글이니 당연히 퇴고 과정에 훨씬 많은 공을 들인다. 자르고 붙이고 바꾸다 보면 원래 글에서 겨우 한 문장만 살아남거나 아예 통째로 사라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 지루한 과정 때문에 그동안 비효율적인 글쓰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루를 다 쏟아도 겨우 A4 용지 한 장의 글만 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이 습관 역시 하루키와 같아서 안도했다. 그도 소설을 쓸 때 처음에 계획을 세우는 일 없이 전개도 결말도 알지 못한 채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한다. 그러는 게 쓰는 동안에 단연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글은 처음부터 한 지점(주제)을 생각하고 써야 한다고 익히 배웠지만, 내겐 오히려 그 방법이 독이 되곤 했다. 사고가 자유롭게 뻗어 나가지 못하고 한곳으로 모이다 보니 글이 짧아지거나 자칫 따분해질 때가 많았다. 그보다 마음 가는 대로 왕창 쓴 다음 덜어내고 붙이는 게 훨씬 자연스러웠다. 결국, 3개월에 걸쳐 만든 초고는 다시 한 달여의 퇴고 작업을 마친 뒤에야 최종 목표에 다다를 수 있었다.


주변에서 두 번째 책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근육통이라도 걸린 듯 온몸이 쑤신다. 일거리를 받으면 도망가고 싶은 직장인들의 마음과 같다. 하지만 일처럼 몰입하는 순간이 고되어도 그만큼 희열을 느낄 때라는 것을 안다. 고통과 고민이 없다면 그 무엇도 창조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소설 쓰기를 ‘형상을 갖지 않은 주관적인 일들을 형상이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변환해가는 것’으로 정의했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도 비슷하다. 무(無)에 가까운 흩어진 생각을 눈에 보이는(有) 문자로 재창조하는 것. 그렇다면 일을 하지 않는 나에게 글쓰기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이 된다. 결국, 나는 힘든 걸 알면서도 홀린 듯 다시 일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에서 느끼는 ‘쓸모있는 인간’이라는 가치를 포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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