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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타자기 Nov 07. 2023

나는 세 명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들었다_01

대통령 세 명 만든 어느 카피라이터 이야기

나는 세 분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드는 데 모두 참여한 카피라이터이다. 이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나와 가까운 지인들 뿐이다.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그분들  선거 과정에 참여하여 대통령이 는데 글과 카피로 힘을 더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참여했을 때 모두 대통령에 당선되셨다. 못 믿을 수도 있다. 그런 카피라이터가 있었어? 한 분만 잘 써도 유명해지는데... 세  대통령 카피를 썼으면 벌써 유명해졌겠지... 왜 유명하지 않은 건데?라고 물으실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유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것이 거짓일 수는 없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함께 한 이들은 다 다르지만, 그들이 다 명백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무슨 일이든 자랑하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625 전쟁 전, 피난민으로 외삼촌과 함께 북에서 월남한 어머니는 남쪽에서의 삶이 평탄치 않으셨다. 전쟁세대 분들이 그렇듯 항상 불안을 달고 사셨고, 자랑이 혹시 모를 위험으로 이어질까 자식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신신당부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내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쑥스럽고 이게 자랑하는 건 아닌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한 번은 글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한 분 대통령 만든 스토리도 세상에서 회자되는데, 세 분 대통령 카피를 쓴 인생도 조금은 풀어 내놓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처음 대통령을 만들 때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 관여했다. 파릇파릇한 청춘이었다. 젊기에 청운의 부푼 꿈을 꾸기도 했다. 꿈에 가까이 가기도 했다. 두 번째 대통령을 만들 때는 회사 몰래 했다. 저녁에 퇴근해 선거사무소로 출근했다.  밤새 카피를 쓰고 아침이면 아무 일 없는 듯 회사로 출근했다. 석 달 넘게 잠을 거의 못 자며 일명 투잡을 뛰었다. 아이가 생기고 양육을 위해 돈이 궁했던 시기기도 했다. 하지만  놓지 못한 대통령을 만들고 싶은 욕망과 열망이 더 컸던 탓이다. 당선 후 통장에 찍힌 일에 대한 보수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니었다. 대신 대통령 당선에 대한 자긍심이 그것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그때 쓴 카피가 당시 유명했던 카피라이터 분이 내신 신간 책 띠지에 크게 박혔었다. 마치 그분이 쓴 카피처럼 서점가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그땐 꽤 속이 쓰리기도 했었다. 분명, 저 카피는 내가 쓴 건데...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참여했기에 벙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왜 아르바이트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나중 글에서 밝히도록 하겠다. 세 번째 대통령 만들기는 다니던 광고 회사에서 경쟁을 통해 수주했다. 이번에는 당당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광고주로 대통령 후보를 만난 것이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분들의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분들의 원고를 쓰기도 하고, 광고를 만들며 슬로건까지 쓸 수 있었는지?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5년마다 열리는 대통령 선거가 없었을 때는 어떤 광고를 맡아 진행했었는지도 양념으로  함께. 


카피 잘 쓰는 비법이라든지, 정치광고 잘하는 법 등 이런 나열은 여기서 생략한다. 카피 방법론 또는 정치광고에 대한 책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광고 바이블 같은 그 책들을 수없이 읽어도 쉽게 채득되지 않는다. 해답을 제시하되 요약 풀이로 명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토리를 전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답이 이해되도록 전달할 것이다. 대통령 카피는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한 번만 들어도 아는 최고의 선거 슬로건은 이런 탄생배경이 있었구나, 그래서 지금까지도 강력한 정치 슬로건으로 쓰이고 있구나, 결국 '카피란 이런 거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어보려 한다. 추상적으로 전달하지 않으려 한다. 소설처럼 스토리로 전달해 진정한 이해와 감상에 이르도록 해보려 한다.

세 분 대통령 모두 인품과 업적이 훌륭하신 분들이다. 하지만 글을 읽는 이들을 위해 앞으로 존칭은 생략하고자 한다.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정말 가고 싶은 과는 문예창작과였다. 아버지는 3남 2녀를 모두 대학에  보내셨다. 공무원 월급은 다섯 자식을 공부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시골의 논밭계속 팔았다. 그런 아버지께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리기 어려웠다. 거기 나와서  먹고살 건데?라고 하시면 당시 상황에선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요즘처럼 다양한 창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창작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은 소위 잘 나가는 몇몇 시인이나 소설가 정도였다. 엄청난 재능을 가진 자식이 아닌 이상 그 길로 가는 걸 찬성할 부모는 없었다. 무엇보다 가고 싶은 문예창작과는 하숙이나 월세로 살아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 비용은 또 어디서 감당한단 말인가? 국어교육과는 선생이 되어 경제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도구였다. 작가가 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 당시 전국을 휩쓸었던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나랏말싸미를 가르치는 국어교육과는 늘 선봉이었다. 시위에 뛰어들어 세 번을 다쳤다. 한 번은 전경이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열 바늘을 꿰매었다. 또 한 번은 겁먹은 학우가 도망치면서 잘 못 던진 화염병에 맞아 다쳤다. 겨울이라 패딩점퍼를 입었는데 옷에 불이 금세 붙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 마지막 사고는 삶에 조금은 치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대학생 측과 정부는 평화시위에 대한 합의를 했다. 화염병 시위를 전면 중단하고, 정부도 평화시위를 보장하기로 했다. 사고는 합의 전날 발생했다. 마지막 화염병을 던진 후였다. 군복대신 청바지를 입고 진압에 나서는 전투경찰인 백골단이 눈앞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를 내 얼굴로 던졌다.


'나는 죽었다' 뇌가 급히 신호를 보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1cm 차이로 돌멩이가 숙인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휴 죽었다 살았다. 마음을 놓는 순간, 또 다른 돌멩이가 무릎을 강하게 때렸다.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학우들에 의해 대학병원 응급실에 누웠다. 레지던트는 왜 다쳤는지를 물었고, 무릎을 굽혀보라고 했다. '이상하다' 아무리 힘을 줘도 무릎은 굽혀지지 않았다. 다리 자체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레지던트가 간호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리 잡아! 그리고 내 무릎을 있는 힘껏 굽히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시 반대로 다리를 펴는 데 또 한 번 비명이 터졌다. 창피할 겨를도 없었다. 대왕 주사기를 가져와 그 큰 바늘을 무릎에 꼽고 죽은 피를 쪽쪽 뽑아냈다. 십자인대 파열이었다. 그 일로 군 신체검사 재검을 받았다. 조금만 수를 써도 군 면제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게 군면제 받고 싶지 않았다. 그날 다수가 면제를 받았지만 나는 방위병 통보를 받았다.

 

동기들이 국어선생이 되기 위해 길을 걷는 동안 다른 길을 모색했다. 지금이야 보는 시야가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국어책에 나오는 글들을 제자들에게 못 가르칠 것 같았다. 책에 실린 송강 정철의 글들은 임금께 아부하는 글로 보였다. 일제강점기 낙엽을 태우며 커피콩을 볶고, 그 향을 음미하는 수필은 낭만보다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이야기 같았다. 문장이 아무리 아름답게 쓰였어도 좋은 글이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졸업하고, 선생이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까?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를 보게 되었다.


'카피라이터, 어디 없어?'


서울 광고카피아카데미에서  신문 광고 헤드라인이었다. 아, 이런 직업이 있었어? 곧장 시내 대형서점에 갔다. 카피라이터에 관한 책은 거의 없었다. 광고에 대한 서적도 몇 권 없었다. 지금 보면 거의 초보 입문서 정도의 책이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가뭄에 단비 같았다. 서점에 책을 모조리 읽었다. 방위해제 후, 곧바로 서울 광고카피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다행히 수강 마감 날, 남은 한 자리였다. 카피 학원 동기들도 모르는 광고도서관에 대한 정보도 찾아냈다. 도서관 출입 방명록에는 쟁쟁한 광고회사명과 직원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일반인이라 적으며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들처럼 광고회사에 꼭 들어가리라 마음먹었다. 그곳에는 훌륭한 마케팅 서적들도 많았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은 마케팅 신세계로 인도하는 마법 같은 책이었다. 한 자 한 자 열심히 서머리 했다.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삼성의 세계일류 캠페인 카피가 이 책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카피는 카피구나 깨달았다. 열심히 한 결과였는지 운 좋게 광고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거기서 사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이 어느 날 내게 물었다.


"00 씨, 김대중 대선광고 안 해 볼래?"


광고회사에 막 정착할 찰나, 회사를 옮기는 모험이었다. 지지율도 낮은 그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희박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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