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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Jan 26. 2024

2화. 파란 거짓말

in Iceland


OO 보존의 법칙

"OO" 부분에 아무것이나 갖다 붙어도 대략 들어맞는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가끔 한다.

 

그 유명한 질량 보전의 법칙을 발견한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부아지에 (프랑스, 1743~1794)가 만약 자신의 이 위대한 발견이 비단 과학의 발전에만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정녕 우주는, 그리고  그 안의 우리는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모자람이 있으면 다른 곳에서 그만큼 채워지고, 넘침이 있으면 반드시 어느 곳에서는 비워지는 법.


불행 가운데 행복이 채워지고, 사랑 가운데 증오가 싹트며, 절망 가운데 희망이 나온다.



극한의 혹독함 가운데 극적인 아름다움이 나온 나라가 바로 아이슬란드이다

대부분이 화산지대로써 매우 척박하여 국토의 6% 정도만이 살만한 땅이라니 얼마나 혹독한 현실인

가.







하지만, 바로 이 엄청난 지질 활동으로 인해 압도적이며 경이로운 아이슬란드만이 가진 독특한 자연의 절경들이 탄생됐다.







아득히 먼 옛날,  노르웨이 바이킹과  그 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온 그들의 조상들은 살을 찢는 추위를, 천지가 갈라지는 요동을, 시도 때도 없이 거친 자연의 입이 품어내는 불을 견뎌냈다.

그들은 ‘존버는  승리한다’를 몸소 증명하며, 지금의 이토록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것이다.





하이-텐션 (들뜬상태, 흥분상태, excited state)---> 기저상태 (ground state)


잠깐 우리 여정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대체로 짐 싸기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한국 교육 학술 정보원에 검색을 해봤다.

“ 가져가면 후회할 짐과, 안 가져가면 후회할 짐 싸기에 대한 정량적 고찰”이라는 논문 검색 결과: 총 0 건


많이 배우신 박사님들께 고한다. 각종 분야에서 인류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학문에 정진하시는 당신들의 노고는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때로는 부질없고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욕지거리가 나올법한 주제도 고찰해 주시라.  나같이 못 배운 인간(들)을 위해.


당장 몇 시간 후면 2주간의 (캠핑도 포함) 일정을 떠나지만 아직 짐도 다 못 싼 지경에서도 왜 그녀와 나는 떨리고 설레는 마음을 단속하지 못했을까 뒤늦은 분석을 해본다.

음악 듣고, 노래하고, 춤도 추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아이패드에 다운로드하다가, 책을 싸다 말고 읽다가, 싸던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 양치질을 했다가 다시 배가 고파져서 먹다가 다시 양치를 했다가....  

각종 오두방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잠을 거의 못 잤다.


봐라! 여기에도 OO 보전의 법칙이 숨어있지 않은가?

넘치는 하이-텐션(들뜬상태, 흥분상태, excited state) 가운데 고갈된 우리의 에너지!


과학적으로, 모든 자연은 웬만해서는 에너지가 낮은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깨알 상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당시의 들뜬상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 고갈 상태인, 기저 상태로 곧 곤두박칠 운명이었다는 것을.   


몸서리쳐지게 정확한 과학 법칙이란..... 난 이래서 이과가 싫다.


파란 거짓말 


다음날, 아스팔트와 자동차들이 내뿜는 숨 막힐 듯한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쳐내며, 짐을 메고, 들고 ( 무식하게 큰 DSLR을 내 일자목에 걸고), 터미널까지 공항버스를 타려고 도시의 한 폭 판을 질러 올라간다.

뜨거운 숨을 길게 내쉰다.


한 발짝 앞서서 걷던 그녀가 뒤돌며,


엄마, 괜찮아. 조금만 참아! 우리 일정 중에 아마 오늘이 가장 힘든 날 일거야.  
다 왔어. 버스만 타면 그때부턴 괜찮아져


그녀는 자신의 매우 겸손한 인생 경력에 비해 등산을 꽤 많이 해봤다.

등산 중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하는 파란색 거짓말을 어느새 그녀도 다른 이들에게 하는 걸 보며, '아!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산에서 배울 게 없으니 하산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 작가의 주: 하얀 거짓말이라고 할 때의 하얀색은 뭔가 되게 인도적 차원의, 보다 높은 정의(?)를 위한 선량한 거짓말 같은 느낌이다.  위와 같이, 서로 그것의 신뢰성을 매우 의심하면서도, 예의상 오고 가는 말속에서 약간의 희망이나 긍정을 심어주려고 하는 거짓말일 경우에 나는 그것을 파란 거짓말이라 부른다.


‘아마 오늘이 가장 힘든 날 일거야’라는 그녀의 그 말은  파란색 거짓이었을까?

아니면 다가올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 본연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어쨌든 그런, 에너지 기저상태 (ground state)로 공항에 도착한 아이슬란드 현지 시간이 새벽 4시 30 분.


렌터카 업체는 아직 안 연 것인지, 안 받는 것인지 전화불통.

공항에 사람이 이렇게 미어터지게 많은데, 공항 렌터카 라운지는 이미 오픈해서 손님을 받고 있건만, 왜 내가 예약한 렌터카 회사만 늦잠을 자는 것이냐? 저렴해서 그러느냐?


또다시,  “OO 보존의 법칙”  

모자란 돈 가운데 넘치는 불편함(혹은 빡침!)




어쨌든, 오전 8시가 다되어 영접한 렌터카에 짐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모바일 핫스팟을 연결하고, 운전석과 보조석에 각각 본인의 자리를 찾아 들어앉으니, 고갈되어 있던 에너지가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다.


자, 이제 출발.

첫 코스는 활화산계에서 아직 한창 현역으로 활동 중인 Fagradalsfjall였다

 

 Safetravel 웹사이트를 확인하니, 오늘은 관광을 위해 오픈이 되었고,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다음 코스를 가는 길목이어서 우리는 먼저 그곳을 들르기로 한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려다 말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본다.

이유인즉슨 차에 앉아 밖을 보니 관광객들이 간간히 줄지어 걷는 동선이 상당히 긴 것 아닌가.


등산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좀 걷는 정도? (왕복 2-3시간)인 코스라고 알고 있었다.

물론, 평지가 아닌 게 문제 이긴 했지만, 우리에겐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 코스임에는 분명했다.

나무가 있는 산이 아니라 화산이기 때문에 가는 곳까지의 절반정도의 대략적인 길을 볼 수 있었다.

밑에서 봤을 때 가장 높아 보이는 부분에 움직이는 점들(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봐선, 가장 높은 부분을 넘어가서 무엇인가가 있는 그런 구조인듯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용감이 흘러 굳어졌지만, 아직은 세월의 타격을 오래 받지 않은 듯 제멋대로인 시커먼( 제주 현무암보다 몇 배 더 시커먼) 큰 돌들이 있는 길이 보였다. 다음으로는 점차적으로 경사가 있다가, 끝에는 심한 비탈 비슷한 길을 타고 그 너머로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으로 ‘우리 저기 올라가야 돼?’라는 무언의 활자를 주고받았다.

먼저 용기 있게 입을 뗀 건 나다.


“ 아니 그게 말이지, 우리 스케줄이 당장 오늘부터 운전을 꽤 해야 되는데, 우선 우리 여기서 딱 30분만 눈을 붙였다가 걸어가 보자. 그래도 화산 구경은 해봐야 되니깐. 그렇지? 어때?”


그녀는 고개를 끄떡일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의자를 뒤로 젖혀 눈을 감는다.


나도 시동을 끈 후, 혹시 자는 사이 우리를 누가 업어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차문을 단단히 잠그고, 혹시 모를 질식 방지를 위해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서는 의자를 힘껏 뒤로 젖혀 바로 잠으로 빠져든다.


꿈이었나? 기억이 흐릿하다.

간간히 실눈을 힘겹게 뜬 것도 같고, 열어둔 창문 틈으로 간간히 사람들의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멀어졌다 했던 것도 같다.


갑자기 놀라며 잠에서 깼다.

망했다! 차에서 2시간을 넘게 잤다.


깜짝 놀란 내가 바로 옆에서 그녀를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쌔근쌔근 콧소리가 어렴풋 들리고, 그녀의 입으로부터 침이 멈춤 없이 이어져 흐르는 것을 보니 살아있다.

아직 그녀가 자고 있다.


가끔 궁금했었다.

잘 때 흘리는 저 많은 침은 우리 몸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침의 근원에 대해  몇 초간 상념에 빠질 뻔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추스르며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바로 어제 그 들뜬 상태 (exited state )의 에너지는 다 어디로 가고, 오늘이 마치 여행 마지막 날인 것처럼 몸뚱이는 한없이 땅으로 꺼진다.

늙었나 보다. 그래 난 늙어서 이 지경이라 치자. 그런데 내 옆에서 저 모양으로 자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한 십여 분쯤  기지개도 켜보고, 창문을 열어 공기도 들이마셔보고, 물도 마시고 , 대략 5시간 전 공항 출국 면세점에서 산 초콜릿도 욱여넣고 도리질을 쳐본다.


둘이 이러 저런 대화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컨디션이 별로 인 듯하다.

군대식 시간표 ( 9시 30분 취침, 6시 기상, 칼 각으로 정해진 삼시 세끼 시간)인 삶을 추구하는 그녀가 전날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든 것이 이유이리라.


한참을 걸은 것 같다.


그녀가 길을 가다가 가장 산뜻해 보이는 세명의 여자 한 무리에게 물었다. (1화. '그녀로 말할 거 같으면'에서 누락된 게 있는데, 물어보는게 특기다)

얼마나 가면 되냐고 위에는 무엇이 있냐고 등등...

대화가 솰랴솰랴가 오고 간다.

근데 그들이 말 끝에 아직 한참 가야 한다고 입방정을 떠는 것이 아닌가.  


정녕, 너희는 파란 거짓말을 모르느냐? 

산(山) 사람들에겐 국제적, 암묵적, 그러나 비 공식적인 조약 같은  “얼마 안 남았어요.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가면되요!" 라는 파란 거짓말을 정녕 모르냔 말이냐 이것들아!!!  


안 그래도 구실을 찾던 그녀는 몇 초쯤 짧은 상념에 빠지는 듯 싶더니,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것도 특기임) 이미 허공에 뜬 발걸음을 단호히 멈추고 뒤로 물린다.

일종의 회유, 일종의 거래, 일종의 애원 같은 말들을 해본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기 끝까지 올라가서 뭐가 있는지 한번 보자고 했지만, 그녀는 아시다시피 대체로 단호하다.  


우습다. ‘오늘이 제일 힘든 날'!?

훗! 결국 그녀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모르는 그저 애처로운 인간이었음이 판명되는 순간이다.


발길을 돌려 다시 주차장으로 향하며, 나는 마지막 날 공항 가기 전에 시간이 있으니 그날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에필로그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행 막바지 레이캬비크에서 5.4 지진을 몸소 체험하고,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녀는 나에게 ‘화산 투어’ 같은 정신 나간 소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지진을 경험한 후, 여행이 끝나기 전 날 까지 내내 오후 4시만 되면 (지진이 발생했던 대략적인 시각) 일정을 바꿔 당장 돌아 갈 비행기표나 알아볼 생각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우린 원래대로 2주의 일정을 성공적으로 (화산투어 빼고) 마쳤다.

*당시 실제로 그곳은 전체적으로 폭발 임박! 위험지역! 이 되어 관광객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까? 본 걸로 치자!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agradalsfj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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