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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아루츠키 Feb 16. 2023

민국의 시대  段祺瑞执 ; 政府旧址 단기서의 관리부

[回梦到北京] 하룻밤의 꿈같던 기록별장

所有的时间、地点和事件都在这里。

没有哪个时代,包括过去和未来,比现在更神圣


모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그 어느 시대도 지금보다 더 거룩하지는 않는 것이다


-윌든 , 헨리 데이빗 소로우







베이징에서 의도치 않게 여행생활자로 보낸 5년의 시간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마저 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응이 되었다. "그럴수도 있지"라는 마인드와 앞으로 다가올 많은 고난들 가운데 평정심을 잃지 않는 방법을 깨달았다. 또 어느땐가는 분명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고 삶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걸 다시한번 크게 깨닫게 되겠지만이 그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날 성장시켰으리라 믿는다.


이 시간을 통해 경험한 것들은 나만의 기록별장에 차곡차곡 쌓아올려졌다. 그 안에는 어린시절의 기억부터 최근의 베이징생활까지 다양하게 들어가 있다. 기록별장에 있는것들은 나이기도하고, 경험이기도하고, 또 다른 삶에 베이스가 되어지기도 한다. 그 소중한 이야기들을 적어가던 어느날 우리는 적자생존의 삶을 살아야하는 운명이라며 예원씨가 우스개소릴 했던 기억이 있다.





段祺瑞执 ; 政府旧址 (단기서의 관리부) 두안치루이즈 ; 정부소재지

* 관광명소가 아닌 정부 소재지로 개방된 곳은 아니며 보안(security guard)이 입구 상주해 있다

* 중화민국시대(북양임시권력 정부)의 정치가이자 장군의 수장이면서 국무총리였던 단기서의 옛집으로 바이두 지도에는 나와있다.


add. 张自忠路3号

public transit. 5号线张自忠路站A西北口

business hours. 政府所在地 (the seat of government)

charge. 免费 Free 입장료는 없지만 일반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음



항상 지나가면서 궁금하는 장소가 있었다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후통에서 멀지 않게 떨어진 외딴 곳이었고 민국시대의 건물이 있는 곳이었다  수없이 지나가면서 베이징에 흔하지 않은 옛 유럽 건축양식을 가진 민국시대 느낌의 건물이 뭘까했던 곳이다. 궁금증을 일으키케 만든 그 건물을 두고 누군가가 옛날 인민대학 건물이라며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는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건물이 엄청 많다! (Curiosity Kills The Cat) 호기심이라는 좋은 말보다 집요함이라는 고집스러운 단어가 잘 어울리는 나는 그 건물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중국인도 못들어가나 하며 파고들기 시작했다.




몇달을 찾아보다 포기하려던 그때 중국의 SNS인 小红书에서 중국인이 민국의 건물과 찍은 사진들이 발견하고선 들어갈 수 있는건가 라며 열심히 검색을 했다. 그 집요함은 겪어보지 않았던 시대로 들어가는 열쇠로 이어졌다. 입구의 열쇠를 찾았을땐 어려운 수학문제를 푼것마냥 신이났다 그렇게 나만의 베이징 속 애정스팟이 하나 늘어났고 새로운 세상에 초대받은 것처럼 설레였다


한국에는 민국 시기나 조계지 시대의 건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때문에 이런 건축양식은 상당히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옛 열강들이 주둔했던 칭다오나 다롄,상하이, 샤먼같은 곳의 조계지는 이런 양식이 많지만 이 민국시대건물처럼 정교한 건축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후통의 경우에는 명나라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온 건축 양식으로 일반인에게도 오픈되어있고 베이징런도 거주하며 관리하는 문화유산인데, 이 건물은 일반인에게 공개도 하지 않는 관리 대상 건물이라 더욱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은 신기하게도 외부의 것을 잘 받아들이는데다 본인의 색깔을 입혀 중국화 해버리는 특징이 있는데 이 건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세밀하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만드는 이 빈티지한 산물은 그 시대로 입장시켜주는 신기한 느낌이었다 이후에 이런 비슷한 건물을 베이징팡에 만들고 관광지로 만들긴 했지만 민국의 시대부터 켜켜이 지난 기록을 묻어온 오리지널의 기록별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내가 지나가면서 항상 궁금했던 건물은 贝勒斐苏府 (bèilè fěi sū fǔ : 패륵비소부 공친왕 창잉의 집)였다. 현재의 건물은 1907년 세워진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중국전통 양식과 서양 양식의 절충된 건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설계상에서는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기본 모델로 한 스타일을 추구하였지만 실제 건축에 참여한 시공자는 전부 중국 장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새로운 이런 형식의 건축하는데 있어 중국전통식과 서양식이 혼재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편 전쟁이후 서구 열강들의 전통적 서양식 건물군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변화되어 가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한다.


贝勒斐苏府 건물의 주변에 들어서 있는 부속 건물들은 현재 인민대학교 교직원 숙사와 중국동구문제연구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은 일반인은 아예 출입은 제한적이다. 贝勒斐苏府 역시 개방되어있는 건물은 아니라서 입구에서 보안이 지키고 있으나 못들어가는건 아니었다. 들어가서도 건물 외부만 촬영할 수 있고 안에는 직원이 상주해 들어갈 수 없으며 중국 사회 과학원으로 사용되는 동쪽 건물은 사진도 찍지 못하게 막았다.





原名铁狮子胡同。清代这里有三座府第:东为和亲王府,中为贝勒斐苏府,西为和敬公主府。和亲王府的前身是贝子允府第。雍正十一年(1733)世宗五子弘昼改建为和亲王府。贝勒斐苏府,是清初恭亲王常颖的府第。清末,两府内的建筑全被拆除,重新建造了三组砖木结构的楼群:中间的主楼为欧洲古典式灰砖楼,东、西、北各有一座楼房。


2009年10月21日晚,原段祺瑞执政府旧址大门被汽车撞毁,该处为国家级重点文物保护单位。

1912年袁世凯任中华民国临时大总统时,总统府和国务院设在这里;

1919年后,靳云鹏任国务总理兼陆军总长,改为总理府;

1924年段祺瑞被北洋军阀推举为中华民国临时执政,这里改为执政府。1926年4月10日,北京发生了**。驻北京的国民军将领鹿钟麟包围了临时执政府,段祺瑞出逃;执政府倒台,由冯玉祥将军接管。王树常任北平卫戍司令时。又改为北平卫戍区司令部。1937年前这里改为二十九军驻北平军部及冀察政务委员会。1937年这里成为冈村宁次为首的日本华北驻屯军总司令部,东院则是以喜多为首的日本特务机关兴亚院。1945年后改为十一战区长官司令部和国民党北平警备司令部。1949年中国人民大学作校舍。1978年主楼由清史研究所使用。



이 곳은 铁狮子胡同 철사자 후통이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의 해태처럼 铁狮子[tiě shī zǐ ]철사자 : 중화민족 국보(国宝):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철사자 모형이 있다.


청나라의 시대에 이곳에는 세 개의 관청이 있었다. 동쪽에는 화친왕부(和亲王府),  중간에는 공친왕 창잉(贝勒斐苏府bèilè fěi sū fǔ 패륵비소부)의 집(승공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쪽에는 화경공주부(和敬公主府)가 있다. 화친왕부의 전신은 贝子(beizi)윤부제였다.(베이 가문의 관공서였다.; 贝子[bèizǐ]贝子1.청(淸)대 작위의 하나.)  용정11년 (1733) shìzōng 의 다섯째 아들 hóng zhòu에 의해  화친왕부(和親王府)로 재건되었다. 贝勒斐苏의 가옥은 청나라 초기의 공친왕 창잉왕자의 거처였다. 청나라 말기에 두 가문의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세 그룹의 벽돌 목재 구조 건물이 재건되었다. 가운데의 본관은 유럽의 고전적인 회색 벽돌 건물이었으며,동서북에 건물이 있다.


2009년 10월 21일 저녁, 국가 중요 문화재 보호 단위인 낡은 단기서 정권의 대문이 자동차에 의해 파손되었다.

https://baike.baidu.com/item/段祺瑞执政府旧址/3208668?fr=aladdin

1912년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凯)가 중화 인민공화국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때 총통부와 국무원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1919년, 단기서가 베이양 정부(중화민국시대 :북양임시권력 정부)의 국무총리 겸 육군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총리부으로 변경되었다.(이때부터 단기서의 관리부라 명명하게 된 것 같다; 원래 청육군과 해군부로 쓰이던 건물이었다고 한다)

1924년, 단기서는 북양군벌에 의해 중화민국의 임시 통치로 추대되어 318참사에서 일어난 정부를 통치했다.

*1926년 3월 18일 각계군중 5000여명이 천안문 광장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중국침탈을 반대하는 집회를 마치고 단기서 정부의 친일적 태도에 항의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자 단기서는 군중을 향해 발포를 명해 수백여명의 사장자를 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3.18사건이다.

1926년 4월 10일, 베이징에서 정변이 발생하였다. 베이징에 주재하던 국민군의 장령인 鹿钟麟lùzhōnglín이 임시정부를 포위했으며 단기서는 도망쳤고, 집권부는 실각하여 冯玉祥féngyùxiáng장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왕수는 베이핑의 영구 수비대장이었고, 베이핑 수비대 사령부로 변경되었다.

1937년, 이 곳은 북평군부와 간차오 정무위원회의 주둔지에서 29육군으로 변경되었다.

1937년에는 오카무라 네지가 이끄는 일본 화북군의 본부가 되었고, 동쪽 건물은 Kita가 이끄는 일본 스파이 기관 Koiya House였다.

1945년 이후 십일전구 장관사령부와 국민당 북평경비사령부로 변경되었다.

1949년 중국 인민 대학교를 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1978년  본관은 중국 인민대학교 청나라역사연구소로 사용되었다.

1984년 베이징시 문화유물보호단위로 확인되어 2006년 국가주요문화재보호단위로 승격되었다.


- 주석

*화친왕부 : 이곳은 옹정의 다섯째 아들 홍주가 거주했었으며, 청나라 육군부와 해군부의 자리였으며, 민국시기에는 단기서(段祺瑞) 집권시 정부가 자리했다. 현재는 중국 사회과학원으로 사용되는 정부부서로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줄입통제지역)

*화경공주부 : 청건륭 황제의 세번째 딸 고윤화경 공주가 시집을 간 후 하사된 저택이다. (역시 개방하지않고 있다)

*현재 동쪽은 중국 사회 과학원으로 사용되어 출입이 제한되고 서쪽의 화경공주부는 개방을 하지 않은 상태이다





Arch 咖啡厅&酒吧


add. 张自忠路3号

public transit. 5号线张自忠路站A西北口

business hours. 11:00 - 02:00

charge. coffee 30-40元 , shortcake 40-50元



민국시대의 열쇠는 건물 안에 숨겨진 카페가 있었다.  이 카페를 이용하러 왔다고 하면 보안아저씨는 카페의 확인을 거쳐 입장시켜주었는데 이 카페는 하룻밤 꿈처럼 민국을 시대로 넘나들수 있는 입장권이었다. 낮에는 커피숍이지만 원래는 새벽 2시까지하는 bar로 운영되며 건축물회사에서 운영하는 듯했다. 중국사람들도 기념일 챙기는걸 좋아하는데 이 카페는 특별한 기념일 밤에 (크리스마스, 새해, 할로윈등등) 많은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었다.밤에 만나는 민국시대의 건물은 더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맨틱할 수도 있고, 혁명의 순간일 수도 있고, 치정극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코로나발병은 많은 것을 앗아갔고, 삶의 대하는 자세를 변화시켰고, 내면의 단단함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월든이라는 책이 가장 큰 역활을 하였다.


코로나 발병 후. 중국은 2020. 3월 말 급작스레 국경을 닫아버렸다. 본토에서 아이들만 남겨두고 주변에 부탁하고 나온지 2주 후인 2월 중순 남편이 베이징으로 돌아갔고, 나는 새로 매수한 집의 잔금날짜와 인테리어 일정만 조율하고 들어가는 일정으로 회사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늦어지는 일정에 남편은 회사에선 가족들의 베이징입국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같이나온 친구들이 3월 중순 하나둘 돌아갈때도 회사에선 우리가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티켓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남편이 눈치를 보는게 너무 짜증났지만 참고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에서 국경을 닫아버린것이다. 베이징으로 돌아갈 방법이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2개월 후 남편에게 하루가 심장병이 발병했다는 얘길들었다 병원에 물어보니 6개월정도 남은 것 같다고 하였다. 그 이후 지옥같은 생활이 펼쳐졌다. 한국 생활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고 매일 슬펐고 매일 울었다 내가 돌아갈 수 없다는무력함, 하루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내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다 


그렇게 한국생활 8개월만에 9월 전세기를 통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전세기를 띄워 베이징당국과 협상에서 들어왔다고 자랑을 했지만 이미 3월에 들어갈 시기를 놓친것도, 다른 사람들은 6월부터 천진이나 충칭으로 들어갔는데 굳이 베이징을 고집하는 멍청함도 질릴대로 질려버렸다. 감정의 롤러코스터 속에서 날 잡아준건 윌든이었다. 윌든은 내 생애 가장 힘들고 아프고 처절했던 순간에 나를 진정시켜주었다. 내용이 너무 절실히 다가와 매 구절 내 안에 새기고 싶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읽는 탓에 읽는 속도가 늦어졌다. 거의 신앙이라고 생각할만큼 같은 구절을 계속 되풀이하며 읽었다. 이것말곤 다른 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같은 느낌이었다. 월든이 없었더라면 그 길고 기약없는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소로우가 남긴 윌든이라는 기록별장안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계속 얘기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현실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살아야한다고. 월든을 읽으며 내 울타리 안의 가족이라는 이름의 책임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이 울타리를 단단히 메워주는 서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걸 깨달았다. 과거에 매달려 불평하거나 괴로움에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해야며 우리에겐 미래에 해야할일이 있기때문에 그것을 잘 해내려면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열심히 잘 살아야하는게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알게되었다.




이 민국시대의 건물들을 보여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당시에 현실을 살아냈기에 미래의 우리에게 이런 기록별장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이런 시대적 양식들은 시간을 넘나들어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 역사적인 장황함들이 녹아져있는 과거의 산물이 세대를 걸쳐 사랑받는 이유는 시간의 부식으로부터 이겨낸 단단한 가치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역사의 모든 순간에도, 낡아져 가는 지금도 시간에도 숭고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어떤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낸 단단함 속에서 나는 평온함을 선물받는다 이런 시간이 축적되어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기록별장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베이징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곳이라고 말했던 지난 5년전의 나는 이 풍파를 만나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고난이 있어야 크는 법이니까, 5년전의 나에게  반드시 이 풍파를 만나야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잠시 알았건, 오래 알았건 시간이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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