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십년
“첫째에게는 사랑을, 막내에게는 새 옷을.”
이 문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셋째를 임신한 후였다. 그 전에도 어딘가에서 마주쳤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흘려보냈으리라. 매우 긴밀한 상관관계가 생기고 나자 걷다가도 앉아 있다가도 떠올랐다. 다자녀를 키우는 지혜가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은가. 세 번째 임신이었지만 아이 셋을 키우는 건 또 새로운 세상이었고, 경험을 공유할 사람도 별로 없었다. 사소한 힌트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첫째에게 사랑을, 막내에게 새 옷을. 사랑을 어떻게 줄지는 좀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새 옷을 사주는 건 할 수 있지. 그게 별거냐 싶었다.
90부터 150까지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는 아무 문제없이 새 옷을 사줄 수 있었다. 첫째가 이미 초1, 둘째는 네 살이었던 데다 빈번히 이사를 다닌 탓에 신생아 옷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갓난아기 옷을 사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한편 물려줄 사람이 없는 물건을 사니 아깝기도 했다. 첫째야 물론이고 둘째 옷을 살 때도 늘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을 쓰는 순간에도 이상하지만, 셋째가 생긴 걸 알고 기쁨보다 당혹감이 더 컸던 건 분명한데 둘째 물건을 살 때는 그걸 쓸 사람이 이 아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셋째를 꼭 낳겠다는 생각도 아니었는데. 아, 성숙한 어른이라면 임신과 출산은 계획적으로 해야 하는 건데. 내게 셋째는 혹시나, 흠... 에 속하는 흐릿하고 모호한 무언가였다.
넷째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딱 이 아이만 입고 버릴 옷을, 이 아이에게만 딱 맞는 옷을 사는 것이 죄책감도 들면서도 통쾌했다.
시작은 옷장 바닥에서 발굴한 둘째의 100 사이즈 옷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그 정도 컸을 무렵 출산의 충격이 가시고 혹시나, 흠... 이 고개를 쳐드는 것 같다. 몸이 큰 편인 막내는 돌이 막 지났을 무렵에도 100 사이즈가 얼추 맞았다. 아이고, 내가 참 알뜰살뜰하네. 나는 만족스러웠다. 큰 애 옷을 입은 작은 애를 보면 왜인지 조금 감정이 벅차올랐다.
둘째로 자란 나는 물려주고 물려받기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첫째의 옷 중에도 비싼 것, 몇 번 안 입은 것,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것만 모아두었다가 둘째를 입혔다. 첫째는 첫째라서 그런 옷이 많았다. 둘째도 그런 옷이 어느 정도 있었다. 그 옷들이 최종적으로 모두 막내 서랍에 흘러들어오니 어느새 옷 살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매 계절 세 아이의 옷을 장만해야 하는 데서 오는 경제적 부담은 옷 고르는 손을 둔하게 만들었다. 선별 기준에 ‘몇 번 입고 버리지, 뭐.’가 추가되었다. 옷을 입을 아기의 몸은 하나고, 그 몸이 한 사이즈에 머무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자꾸 까먹었다.
옷장 정리를 하던 날이었다.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 다음에 또 입을 옷, 물려줄 옷을 아이 별로 정리하는데 카테고리가 자꾸 늘어났다. 다음에 확실히 입을 옷, 다음에 입을지 안 입을지 모르지만 버리긴 아까운 옷, 물려줄 수 있는 옷, 다음다음에 물려줄 수 있을 법한 옷. 주위에 놓인 옷 뭉치들이 어디에 속하는지 점점 알 수 없어졌다. 결국 옷을 사이즈 별로 다시 정리했더니 높고 낮은 옷 산 일곱 개가 생겼다. 90에서 150까지, 거의 모든 사이즈의 아이 옷이 집안에 쌓여 있었다. 막내에겐 열 살에 입을 옷까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셈이었다. 우리는 언제 미니멀하게 살아보냐는 푸념에 남편이 되돌려준 명답(이라 쓰고 팩폭이라 읽는다)이 떠올랐다.
“가족 수가 맥시멈인데 무슨 미니멀 라이프야.”
그래도 사랑하는 헌 옷들
그날 당장 설레지 않는 옷을 갖다 버린 건 아니지만, 옷장에서 막내의 새 옷 비율을 조금씩 늘려갔다. 보풀이 일어난 옷, 무릎 천이 얇아진 옷은 과감히 버렸다. 사실 아이들 옷은 안 설레는 것이 없다. 이건 어디 갔을 때 입었던 옷, 이건 무슨 날 입었던 옷. 무늬에, 색깔에 추억이 스며들어 있어 버리려고 하면 마음이 찡하다. 잘라서 걸레로 쓰는 심플 라이프는 상상도 못 하겠고 쓰레기통에 바로 넣기도 미안해서 다 빨아놓고도 옷장 위에 따로 빼놓았다가 한참 후 버리게 된다.
그러니 옷감이 튼튼해 물려줄 수 있고 물려 입힐 수도 있는 옷을 만나면 예쁜 새 옷을 산 것보다 기쁘다. 다른 집에서 받아오면 더욱 그렇다. 정리하다가 우리 집 아이들이 생각나 다시 빨고 잘 개서 주는 옷에는 꼭 좋은 기운만이 깃들어 있을 것 같다. 나도 즐거운 기억과 건강함만이 담기길 바라며 물려줄 옷을 챙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