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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Aug 26. 2020

일어나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다

육아 십 년

  며칠 동안 막내가 새벽에 깼다. 세 돌이 지나고 부쩍 줄었지만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 잠에서 깨곤 한다. 비염 때문에 자다가 코피가 흐르는 비상사태일 때도 있고, 이불에 실례할 때도 있다. 비통하게 엄마를 불러서 달려갔더니 남의 잠은 다 깨놓고 자기는 쿨쿨 자고 있을 때도 있다.

  선잠에 든 아이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한동안 거실 소파에 앉아 아이 방 동태에 귀를 기울인다. 의식은 반쯤 수면 속에 가라앉은 채로. 깨지도, 잠들지도 못한 마음이 이렇게 보낸 지난밤들 사이를 서성인다.


혼자가 아니라서 더 외로운 밤

  밤낮 없는 출산 첫 몇 주일이 지나면 아기의 생활 리듬도 정돈되고 밤중 수유는 한두 번으로 고정된다. 분유 수유였던 덕분에 수유 간격은 긴 편이었다. 자기 직전에 한 번 먹이고 새벽녘에 한 번 먹이면 밤중에는 한 번만 깨도 되었다.

  그런데 그 한 번이 힘들었다. 분유를 타는 건 의외로 또렷한 정신이 필요한 일이라 비몽사몽간에 끝내고 다시 자기가 불가능했다. 똑바로 계량해서 똑바로 흔들고 똑바로 식힌 후에 똑바로 접은 거즈 손수건을 아기 턱 끼우고 똑바로 먹여야 한다. 아기가 앙앙 울어도 침착해야 한다. 어느 한 단계라도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젖꼭지 잘못 끼웠다가 아기도 젖고 나도 젖고 소파도 젖어서 슬펐던 날도 손에 꼽을 만큼은 있었다.

  나중에는 꾀가 생겨 분유를 미리 재놓거나 딱 서너 시간 후에 먹기 좋은 온도가 되도록 물을 식히기도 했지만, 아무튼 새벽에 분유를 타는 일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피곤함을 주었다. 하루를 끝맺지도 시작하지도 못 하는 일. 배불리 먹은 아이가 다시 잠의 바다에 빠지면 지친 채 정신만 또렷해진 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밤중 수유를 끊고 이른바 통잠을 자기 시작한 후에도 아이들은 자주 깼다. 예민했던 첫째는 만 네 살 반 때까지 새벽 두 시 반이면 어김없이 깨서 울었다. 먹기만 하면 기절하는 듯 잠들어 고마웠던 둘째도, 형들을 반반 섞어놓은 것 같았던 막내도 아기 때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한밤중에 눈을 떴다.

  그렇게 깬 아기는 재워도 곧 다시 울었기 때문에 거실 소파나 아기 방 밖에 앉아서 한동안 기다렸다. 다른 가족이 깰까 봐. 나도 침대에 눕자마자 다시 끌려 나오는 게 싫어서. 아기들은 그저 길게 자는 걸 배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지. 창밖으로 스며드는 게 어둠이면 왜 벌써 깼을까 싶었고, 어스름이면 앞으로 얼마나 더 잘 수 있나 셈하며 울적해졌다. 너그럽게 마음먹으려고 해도 불행하다는 글자를 머릿속에서 씻어낼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은 아기가 바로 내 옆에 있는데. 나를 필요로 하며 우는데. 내가 아이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면 될수록 외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내 세계에서 내가 소외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


  혼자라 외로우나 혼자가 못 되어서 외로우나 외로울 땐 SNS. 인생의 낭비라는 트위터에서 육아하는 동안 많은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새벽이라 올라오는 글도 없고, 어느 게시판을 가도 첫 페이지가 아까 그 페이지일 때 언제 어느 때든 내 접속을 반겨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게임 앱이었다. 그 무렵 내가 즐겨하던 건 간단한 퍼즐 게임이었다. 규칙만 익히면 졸려서 멍한 상태에서도 관성에 따라 플레이할 수 있었다. 컴컴한 방바닥에 앉아 푸른 화면을 들여다보며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리고 있으면 이게 다 뭐 하는 건가 자괴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지만, 애먼 사람에게 “자니...?” 한 번 안 하고 그 시절을 견디었으니 가상의 퍼즐 조각들에게 아니 고마울 수 없다.


  이 애틋한 마음 때문일까, 구남친, 첫사랑 같은 건 발도 들이지 못하는 내 꿈에 이제는 더 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그 게임이 다 나오기도 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서비스 재개!”라는 메일을 클릭하는 꿈. 기존 앱을 지우지 않은 유저만 플레이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읽고 통한에 잠겼다가 “아니, 잠깐. 내가 이걸 왜 또 하려고 하지?”하며 꿈인 걸 깨닫는 꿈.


안녕하고 싶은 불면의 밤들

  막내가 새벽에 깬 요 며칠은 말할 것도 없이 피곤했다. 마침 큰 아이들이 개학하는 주라 아침에 늦잠을 잘 수도 없었다. 허둥지둥 두 아이를 배웅하고, 아직 방학인 막내와 거실로 돌아왔다. 혓바늘이 돋아 있었다. 얼마나 큰 다래끼가 생기려는지 눈두덩이 전체가 욱신거렸다. 결국 핸드폰 타이머를 맞춰놓고 눈을 붙였다. 막내에게 “알람이 삐리리 울리면 엄마 일어날 거야.”하고 말해둔다. 막내는 알아들은 것처럼 놀이방에 들어가 앉아서는 역시나 이해하지 못한 듯 몇 분에 한 번씩 엄마를 부르며 수다를 시작한다. 나에겐 자면서 대답하는 재주가 있다.

  누워 있자니 또 비몽사몽 간이라 그럴까, 힘겹게 맞이했던 지난 아침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났다. 피곤한 몸으로 도시락을 싸서 두 아이의 손을 잡고(다행히 한 아이는 혼자 학교에 갔다) 유치원을 향했던 게 바로 작년이라니. 아직 너무 가깝기 때문일까. 애틋한 마음보다 이만큼 멀어져서 다행이란 안도가 더 크다.

  가끔은 빨리 늙고 싶다. 그래도 작은 아이들과 부대끼며 보냈던 그때가 좋았지, 하고 지금 이 시절을 보석처럼만 간직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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