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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주 Jan 16. 2024

'말할 수 없이'

- 오랫만에 연극 한 편

주말을 온통 동생에게 내어주기 시작하면서

주말이라고 쉬는 것도,

한달에 한번 토요일이면 걷는 모임도,

한달에 한두 번 연극보는 것도,

그냥 다 이미 정해진 선약에 밀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지지난 주말 조카가 지 엄마를 봐주기로 해서 

아주 아주 오랜만에 연극 번개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제목은 '말 할 수 없이' (극단 대학로극장, 이우천 연출, 최보윤 작) 

"가장 가까운 존재가 가장 큰 상처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에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것이 가족이다. <말할 수 없이>는 그러한 애증적 가족상을 세밀히 들여다 보며 현세대가 상실해 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인 '가족'의 의미를 재고한다. 어쩔 수 없은 상처에 대한 이해와 가장 인간적인 화해를 말하고자 한다"(팜플렛 내용 중에) 


사실 제목도 내용도 모른 채, 동행이 좋은 연극 같다 해서 무작정 본 연극이었다. 

시작 전에야 팜플렛을 보고 '아, 가족 연극이구나' 했고,

동시에 재미있으려나? 다소 시큰둥했다. 

작가는 시조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지만 

연극대본을 몇 번 써 무대에 올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극 중 큰딸인 희수는 '예술인 생활보호지원금'을 받을 정도로 경제력이 없는 인물이어서

어쩌면 이 캐릭터에 작가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겠구나 싶었다.  


둘째 딸 수민은 작가랍시고 가정 경제에 무책임한 언니와 몸이 불편한 할머니, 딸을 잃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고모,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는 이란성 쌍둥이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감춘 채 하루하루의 노동을 힘겹게 이어간다. 자신이 무너지면 이 불쌍한 가족들은 모두 길거리로 나앉거나 굶어 죽을 것이라는 위기감에, 자식들을 버리고 재혼한 엄마의 부고와 함께 온 위로금조차 거절한다.  


글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경험을 충분히 해본 나(조만간 망한 작가이야기도 쓰고 싶다)로서는 큰 딸에 크게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현재 내 상황을 보자면 둘째 딸의 심정 역시 공감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질환으로 외출이 불가능한 고모와 자폐스펙트럼으로 평범한 일상이 불가능한 쌍둥이 남매 은수는 이 가정의 일상성을 뒤흔드는 존재들이었다. 어? 나의 동행이 내가 처한 상황을 배려하여 이 연극을 보자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도 모르는 새에 무대 위에 펼쳐지는 그림들에 푹 젖어 들어 울컥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백만 년 만에 본 이 연극의 미덕은 뭔가 허술하고 정상에서 벗어난 시끄러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가족 모두에게 공통으로 짐 지워진 지난 삶의 역사가 그들을 결단코 해체시키지 못하리라는 믿음과 수민의 탈출로 짐작되어지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연극을 보는 내내 느꼈던 답답함에서 벗어나 숨구멍을 틔어 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좋았던 건 소통이 쉽지 않은 은수가 늘상 서툴게나마 치는 기타소리와 웅얼거림이 배경음이 되었고, 에필로그의 노래에서 완결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일으키는 따뜻한 공감이었다. 대본이 그러했을지, 연출이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연극적 장치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또 주말에 나가 연극 한편을 볼 수 있을지……

지난 주말, 일말의 여지없이 지 엄마를 데리고 나타난 조카는 다시 바람같이 사라지고

증세가 더 악화된 듯 보이는 동생은 베란다에 나가 지 딸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무거운 베란다 쪽 유리문이 쉽게 열리지 않자 계속 두드리며 소리를 쳐

아래 집 위집에서 항의를 안 한 게 신기할 정도였고, 

결국 베란다 유리문은 고장으로 열리지 않아 

동생이 나갈 수 없으니 다행인 점이 있었고,

여전히 잠을 안 자려고 해서 조카의 조언대로 데파스 한알을 추가로 먹였으나

새벽 3시반에 일어나 더 이상 자지 않아

나의 밤잠 역시 소실되어 1시간 남짓의 수면만 허락되었다. 

이런 날을 지나고나면 혼자 있는 고요한 밤에도 잠을 설쳐 토끼눈이 되고 만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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