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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얗고 까만 토끼 Jan 01. 2024

나의 구원자, 나의 미투!

망한것 같니? 덕분에 나는 내 계획 보다 훨씬  좋은 길로 향하게 되었어

“약속해 줘~”


볼이 떨리는 미소를 짓고 핑클 노래를 합창하는 여자 대학원생들. 허름한 대학가 노래방이었다. 한 구석에서 늙은 남자 교수 B가 한 손으로 여자 대학원생의 허벅지를,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더듬는 곳. 반대편 구석엔 여교수가 자신의 눈을 가리려는 듯 뻐끔뻐끔 담배를 피워댔다. 노래방 중앙에서는 여러 젊은 남자 교수들과 중년의 졸업생들이 개처럼 취해 춤을 춘다. 그들에겐 ‘노래방에서의 일들은 내일이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날은,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 노래방을 기억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추운 겨울, 학회를 끝마치고 B 대학원 뒤풀이에 참석했다. 아직 A 대학 대학생이었지만 B 대학원 입학 내정자로 뒤풀이에 함께했다. 노래방으로 향하는 길, B 대학 출신의 젊은 교수와 졸업생들에게서 수상함을 느꼈다.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내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지도교수 B가 술만 먹으면 좀 짓궂다며 재차 양해를 구한다. 나를 집으로 보내고 싶은 눈치지만 지도교수 B가 나를 찾는다. 일면식도 없던 어른들의 당부에 나는 "네네 괜찮습니다" 웃으며 답했다. 여자 교수를 포함한 대학교 교수만 3-4명, 졸업생에 대학원생도 6명이나 같이 가는데 큰일이 있어 봤자 무슨 일이 있겠냐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노래가 시작되고, 늙은 지도교수 B가 자기 딸 벌 되는 대학원생들을 마음껏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자 대학원생들을 차례차례 가슴에 품고 어루만진다. 무수리들에게 성은을 베푸는 왕이 따로 없다. 성은을 입은 그녀들은 걸그룹이 되어 핑클의 노래를 부른다. "약속해 줘~" 하는 킬링 파트에서는 다 같이 새끼손가락을 건다. 자신들의 미래를 약속해 달라는 건가? 그녀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지도교수 B는 대학원생을 품에 안은 채,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은 너야. 알고 있지?’


잠깐 핸드폰을 만지는 척 몰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혹시 모르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던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노래방 소리만 들려줬고, 곧 통화는 종료 됐다. 곧이어 개가 된 것처럼 춤을 추던 교수 한 명이 전화를 받고는 내게 멀쩡히 걸어온다. 취한 기색 없는 목소리로 내게 조용히 집으로 가라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도교수 B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알고 있던 학교 선배가 교수에게 지금 당장 나를 안 보내면 큰일 나게 될 거라며 협박했단다.


하… 망했다. 혼자가 된 내 머릿속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다행이다’가 아닌 ‘망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나의 마음엔 당연히 “다행이다. 감사하다”로 가득해야 했다. 입학했다면 어떤 어른도 보호해 주지 않는 최약체 대학원생이 되어 당연한 듯 성추행 당했을 것이다.  그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그것을 버텼을지도 모른다. 입학 후 뛰쳐나왔다면 더 일이 커졌을지도 모른다. 내 소중한 시간들이 원치 않는 일들로 피폐해지고 내가 원하는 올바른 가치관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입학하기 전에 이 커다란 문제를 알게 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하지만 내 머리와 마음은 “망했다. 이제 어쩌지? “로 가득 찼다.


나는 왜 참지를 못해서 몇 년 동안 공들여 준비한 대학원 진학과 그 이후의 계획을 한 순간에 증발시켜 버렸을까. 어쩌자고 그 많은 사람들의 치부를 보고 도망쳐 버려서 그들의 적이 되어 버렸을까. 공짜 룸살롱을 즐기는 교수 B, 이를 방관으로 호위하던 유수의 대학 교수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생활을 이 악물고 버티던 대학원생들까지. 강자 약자 할 것 없이 그들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앞으로 수의사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 이제 뭐 해 먹고살지?


본과 4년의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향후 10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엔 나름 견고했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위해서는 반드시 B 대학원 진학이 필요하다 판단해  B 대학원 입학을 위해 노력했다. 남들 다 쉬는 방학 내내 B 대학원 출신 병원장의 병원을 돌며 실습하고, 학교 실험실에서 논문을 썼다. 후에 돌이켜 보니 나홀로 대학원 합격은  B교수 취향 였던  내 외모 의 영향이 컸던 것 같지만,  나의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할 만큼 열심을 다했다. 그렇게 나의 10년  계획은 성공적인 시작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내가 노래방을 박차고 나온 순간 그 모든 계획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대학원 진학을 포기했고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지금 돌아보면내가 대학원을 때려쳤다고 수의사를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들 모두가 내 앞길을 막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주인공 병이었다. 몇 년 동안 세상이 내가 계획한 대로 착착 돌아가니까 세상이 내 맘대로 될 것 마냥, 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마냥 굴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가장 무서웠던 건,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다시 한 발 내딛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획과 실행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내게 시키지 않았고,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최선을 다했던 일이 내 삶에 큰 불행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했다. 내가 다시 계획이라는 것을 세워 나아갈 때 그 길이 또 잘못된 일이면 어떡하지?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아닐까? ‘나는 왜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다음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대학원을 준비하는 동안 B 대학원의 문제를 알아차릴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B 대학원 출신 졸업생이 내게 에둘러서 하던 말들, 교수님들이 하시던 걱정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말들은 들리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B 대학원에 진학한 나였다. 과도한 자신감, 즉 잘 해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내 귀를 닫아 버렸다. 스스로 쌓아 올린 생각들이 너무 공고해져 버린 나머지 어떠한 조언도 내 방식대로 받아들여 버렸다. 그 누구 탓도 할 수 없었기에, 나 홀로 철저히 무너졌다. 하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 이 일은 내 삶에 가장 큰 자산이 되었다.


이 실패는 자주 내게 말을 건넨다. 내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나를 위로한다. ‘내 삶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 없다. 내 계획 보다 더 좋은 계획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몇 달간 칩거생활을 했지만 꾸준한 운동, 기도 안에서 누리는 사랑, 가족들의 응원 덕분에 임상 수의사 생활을 시작할 용기를 냈다. 어렵게 시작한 덕분인지 하루하루가 너무 감사했다. 운 좋게 만난 병원에서 좋은 동료와 보호자님들을 만났다. 덕분에 더 나은 수의사가 되고 싶어 졌고, 꾸준히 공부했다. 그리고 심장 전문 병원으로 이직한 지 4년 만에 5편의 논문과 수편의 회지글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해에는 훨씬 좋은 조건의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는 몇 년 전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었고, 그 보다 더 멋진 꿈을 꾸게 되었다. 이젠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나는 기대하기 시작한다. 곧 내 계획 보다 더 멋진 일들이 곧 펼쳐지겠구나.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이 실패는 내게 쓴소리를 해준다. ‘너는 자기 확신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다. 항상 겸손하고, 나의 부족함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 확신에 찬, 그저 잘난 척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나에게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그들에게 나의 생각과 계획을 나누며 조언을 구해야 한다.’


과거엔. 이 실패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였고 ,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실패는 내게 엄청난 무기가 되었다. 불행 안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 불행이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아 너무 무섭다. 하지만 한 발짝만 걸어 나와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도 참 많다. 지금 나에게 과거의 실패는 ‘지금 망한듯 보여도 나는 내 계획 보다 훨씬  좋은 길로 인도 되고 있다.‘의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가 되어준다. 만약 지금 당신도 너무 힘든 일로 무섭고 두려움에 숨어 있다면, 이 일이 나중엔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강력한 레퍼런스가 되어 줄것이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 강력한 레퍼런스는 당신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한 발짝만 다시 걸어가 볼 용기를 줄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생각 보다 훨씬 살아 볼만한 하다!


p.s

to . 미래의 힘들 나에게

‘힘든 시간이 또다시 왔구나?  빨리 지나갔으면 싶겠지만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하지 말자. 이 시간 속에서 나는 더 크게 성장할 것이다. 이 시간 가운데 주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기도하자. 절대로 조급해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자알고 있지? 나는 언제나 처럼 좋은 길로 인도 되고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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