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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Oct 05. 2018

"저 그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이를 갈고 다짐하던 것은 결국 '취준 포르노'였다

 담담하게 말할 날을 고대했다. "저 그때 정말 힘들었거든요."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미래의 언젠가. 삼재라는 게 정말 있다면 분명히 나는 2017년 들삼재였다. 작년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열 손가락에 꼽았다. 취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어디서도 내가 좋은 인재라는 걸 증명하지 못했다. 탈락에 탈락을 반복하다 보니 우울함은 기본 감정이 됐다.


 올해도 크게 다르진 않다. 5월에 모 회사 최종면접을 보고 20일 넘게 연락을 기다렸다. 합격통보가 올 수 있다는 희망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주말에 있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집중이 안되는데도 꾸역꾸역 단어를 외우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불합격이었다.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날은 털어놓다가 내 우울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전염시켜 버릴 것만 같았다. 가끔 내 마음의 짐 좀 덜자고 한탄하다가 고개를 들어 가족과 친구들을 보면, 그들이 내 불행을 그저 들어주는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위로는 설익게 느껴질까봐, 장담은 섣부르게 보일까봐 어떤 말도 조심스러워하면서 꺼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왠지 미안했다.


 울거나 소리치고 싶었지만 자격증 시험을 치러 간 고사장은 너무나 고요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을 침묵에 숨이 막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엑스맨 찰스 자비에 교수가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계인 세리브로로 한국을 본다면 내 절규도 분명 들리지 않았을까.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지만 속으로는 "죽고 싶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자비에 교수는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불행이 반복되어 이제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하고, 우울한 감정은 혼자 삭혀낼 수밖에 없는 상태.


 취준생의 고통이 과거의 일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힘들게 노력해서 끝내 꿈을 이뤘다고 나중에 웃으면서 말하고 싶었다. 나를 강하게 압박하는 지금의 불행이, 단지 나를 만든 과정이었다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희미해지면 좋겠다. 나중에 하려 했던 이유는 지금 내 입으로 말하기에 이 고통은 절절함을 넘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냥 취업을 못한 루저가 찡찡대는 것으로밖에 느껴질 것 같았다. 극복하고 나서 별 거 아닌 듯 덤덤하게 말하고 싶었다. 고난과 역경은 이겨낸 자의 입에서 나왔을 때 더 주목을 받는다는 걸 아니까. 내 불행은 지금은 가치가 없지만 나중에 가격이 치솟을 노다지 땅과 비슷하다 여겼다.


 그럼에도 지금 쓰는 이유가 있다. 시작은 '내가 하고 있는 건 극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분명히 나는 하루하루 살면서 어제의 불행을 극복하고 있다. 5월 내내 최종탈락에 속이 쓰렸지만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연이은 탈락에 우울해서 사흘 동안 집안에만 박혀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낭비한 만큼 더 치열하게 살자는 자세로 공부하고 있다. 내가 어제를 지나 오늘을 조금 다른 태도로 시작하는 것 자체도 사실은 극복이었다. 물론 나는 또 낙담할 수 있다. 이 글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시 절망하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든 슬픔을 무디게 만들면서 살아갈 것 같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성취는 아닐지언정, 하루하루 작은 성공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 '취업'은 꾸준한 '태도'의 부산물에 불과한 것 같다. 지금의 내 시절을 미래의 나를 높이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며 이를 갈던 내가 놓친 게 있었다. 매일 불행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하루가 갖는 성공의 가치다. 배우 이성민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생각을 읽었다. 대기만성형 배우인 그는 모 방송사 예능에 출연해 생활고를 겪었던 사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인터뷰에서는 너무 무명 시절 이야기만 한 것 같다고, 그 이야기가 지금 연극 무대에 서는 동료, 후배들에게는 진행형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마음에 걸려 했다. 그는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의 하루가 고통스럽지만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현재이기도 한 자신의 과거를 과도하게 전시하며, 지금의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닌가 후회했던 듯하다. 내가 현재 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취준' 역시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머리를 감고 밖에 나와 펜을 들거나 노트북을 켠다. 그걸 단지 '고통'이었다며 전시하고 싶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고 다짐하던 것들이 결국 '취준 포르노'가 아닐지 반성해본다.


 그래서 이 글은 직장인인 미래가 아니라, 취준생인 지금 쓰는 게 오히려 가치 있다. 취준생으로서 내가 불행에 잠겼다가도 탈탈 털고 일어나는 성공을 수없이 해왔음을 깨닫고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돼 기분이 좋다. 설사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가 거둬온 작은 성공들을 아는 사람, '나'는 여전히 나를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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