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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샤나 Nov 12. 2023

등린이의 후지산 등반 후기

등산을 취미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후지산을 가게 된 데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아버지가 활동하고 있는 산악회에서 간다고 했고, 너도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가겠다고 했다. 그 당시 나의 스펙은 딱 등린이였다. 등산을 해 본 경험은 있지만 결코 잘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숨이 쉽게 차올랐고 쉬고 싶은 순간이 너무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힘든 기억은 미화되는 법. 다녀오고 나면 등산은 참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에 마음이 이끌렸던 것 같다.


호우경보가 발효될 정도로 비 소식이 끊이지 않던 7월, 후지산으로 떠났다. 날씨 탓에 비행기는 한 시간 정도 연착되었다. 후지산은 시즈오카 공항에서 훨씬 가깝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취항을 하지 않아, 나고야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다행히 일본은 날씨가 맑았고 여행 내내 비가 오지 않았다.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한 지점. 산에서 약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으니 산이 얼마나 높고 큰지 체감할 수 있다.

공항에 도착해서 간단한 점심을 먹은 후, 후지산 중턱인 5부 능선(합목)으로 버스로 이동하는 지루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산으로 가는 길은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과 비슷했다. 단조로운 도로 풍경에 질릴 때쯤, 지평선 너머 후지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이렇게 보일 정도면 날씨가 상당히 좋은 거라고 했다.


저녁 8시쯤 5부 능선에 도착해 후지산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5부 능선도 해발고도 2000미터가 넘어서 버스에서 내렸을 때 매우 추웠다. 나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와 같은 반팔티와 얇은 나일론 바지 차림이었다. 서둘러 바람막이를 입고 헤드랜턴을 머리에 찼다. 약 한 시간 올라가니 숙소인 7부 능선 산장이 나왔다.

7부 능선에 있는 산장은 매점을 같이 운영한다

이 산장 안 숙소를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아쉬운데, 숙소는 만화 카페처럼 사각형 공간 두 층으로 되어 있었고, 각 공간마다 세 사람이 잘 수 있게 베개와 침낭이 3개씩 준비되어 있었다. 산악회 막내인 미란 팀장님이 챙겨온 아사히 맥주와 볶음김치, 산장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하고 누웠더니 거의 10시였고, 예정된 산행 시작시간인 자정까지 겨우 두 시간 정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잠이 너무 안 와서 이러다 못 자고 등산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몰려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시계는 어느새 12시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날 5부 능선에서 7부 능선까지 올라갈 때만 해도 꽤 해볼 만하다고 느꼈었지만, 본격적으로 힘든 코스는 7부 능선 이후에 숨어 있었다. 8부와 9부 능선은 어떻게 올랐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등반이 힘들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일단 활화산인 후지산의 지반은 주로 흙이 아니라 돌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흙처럼 뭉쳐지지 않고 찰기가 없는 퍼석퍼석한 바닥이라 미끄러지기 쉽고 등산 난도가 상당히 높다. 비유하자면 큰 고깃집 주차장처럼 바닥이 자갈인데, 거기에 꽤 가파른 경사까지 추가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올라갈 때는 종아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나아가기 힘들었고, 내려갈 때는 등산스틱과 로프에 의존하며 조심조심해도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발 고도가 높아지면서 고산병 증세가 나타났다. 머리가 굉장히 아프고 속이 메스꺼웠다. 쉬고 몇 걸음 안 가서 다시 쉬고 반복했다. 고산병에 좋다는 아스피린을 먹었고, 9부 능선에서 일행과 만나 우동을 먹으면서 꽤 쉬었는데도, 다시 출발하자마자 숨이 차올랐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거세지는 바람도 무시 못하는 요인이었다. 가이드가 바람이 강할 거라고 걱정할 때만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바람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진로를 방해했다. 게다가 평소보다 무거운 짐(경량패딩, 배터리 등)을 지고 가다 보니 9.5부 능선까지 도착해서 위를 올려다봤을 때는 도저히 더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물론 천천히 올라간다면 충분히 정상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행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가이드가 예고한 버스 출발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깝게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내려왔다.

새벽 세시 즈음부터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헤드랜턴도 필요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해발고도 2000미터가 넘는 지점에서는 어떤 나무나 바위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직접 나를 쬐어 오는 햇빛을 경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후지산은 해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이 아름다운 것 같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과 시퍼렇게 보이기 시작히는 만년설이 낀 산등성이가 참 근사했다. 정상을 찍지 못했지만, 9.5부 능선까지라도 도달한 것에 만족하며 주변의 풍경을 만끽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신선이 걸터 앉을 것만 같은 구름, 경이로울 만큼 높은 경사를 자랑하는 산비탈, 해가 뜨기 전에 반짝이던 달과 별들을 충분히 눈에 담고 즐기지 못하고 돌아온 것 같다. 정상을 남기고 지근거리에서 돌아왔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지만, 그 짧은 거리 때문에 여정 전체를 즐기지 못할 필요도 없었다.

후지산 등산 이후 다녀온 주왕산
후지산 등산 이후 다녀온 구봉산

하지만 풍경보다도 귀중한, 후지산 산행이 내게 준 선물이 있다. 진심으로 등산을 즐기게 된 것이다. 그동안 등산을 취미라고 할 수는 없었다. 취업 준비할 때나 끈기 있는 인재로 보이려고 거짓으로 취미라고 써냈을 뿐이었다. 후지산을 다녀온 이후 아쉬운 마음에 하나둘씩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에 등산을 계획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산 중턱쯤에서는 너무 힘이 들어 괜히 왔나 후회하는 순간이 항상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어졌다. 정말 등산을 취미로 즐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경험치를 쌓아 언젠가 떠날 해외 트레킹에서는 좀 더 잘 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오래도록 눈에 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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