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영 Nov 06. 2019

왜 자꾸 잘하고 싶을까

재수 없는 일기

잘할수록 좋은 때가 있었다.

내가 거머쥘 수 있는 것이 나에게서 나올 때. 그러니까 내가 좀 더 명석하게 머리를 쓰면 내게 좋은 점수가 주어지고 그것이 ‘좀 더 좋은’ 집단에 속할 자격이 될 때. 다른 경제적 자본도 인적 자본도 없으니 교육이라는 제도로, 그리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문화 자본을 차곡차곡 쌓으며 10대를 보냈다. 그래서 시각이 비슷한 친구들을 만났고 대학교 이름을 얻었고 양질의 교육을 또 받을 수 있었다.


좋아해서 잘하는지, 잘해서 좋아하는지를 구분하는 건 가끔 어려웠다. 좋아해서 잘하게 되고 잘하면 더 좋아하게 되고, 이런 선순환이 제일 바람직한데, 돌이켜보면 대체로 좋아해서 열정적으로 달려들면(이 무슨 자소서 문구란 말이냐) 좀 잘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못할 것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쓰고 보니 이게 맞는 거 같다.)


어쨌든 잘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얼추 맞추어 살아오면서, 어디서든 어느 정도 잘 하고 인정받고 살아온 것이 - 덧붙여서 그럼에도 너무 노력하진 않는 것, 참 잘 조화하면서도 어디서든 약간 아웃사이더의 기질을 남겨두는 것 - 내게 배어버렸다. 내가 의도하건 아니건 이러한 아비투스가 나를 늘 그 방향으로 밀어낸다.


백화점에서 저렴이 와인을 찾는 나의 구매성향처럼...


잘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도.

유학을 오기는 왔지만 목표가 학문적 성취에 있는 것은 (솔직히) 아니었다. 나를 위한 일을 하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기는 하다. 내가 행하는 것들이 내 안에 오롯이 쌓이고 나를 키워주는 일. 그런 종류의 일로 생각된 것 중 하나가 공부였다. 그럼에도 나에게, 나와 남편에게 프랑스로의 유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에 이 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것 자체도 중요했다. 정신적으로 불필요한 부담에서 홀연히 벗어나 있을 수 있는 이 시기를.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잘하고 싶어진다. 문제는 내가 기존에 들이던 노력 정도로는 그 정도의 “잘함”을 얻을 수 없다는 데 있다. 학문의 깊이와 분야도 이전과 달라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어의 장벽으로 내 역량이 강등된다. 내가 원하는 수준만큼 해내려면 시간과 에너지를 더더욱 많이 소비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거기에 익숙지 않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으려니 허리가 약해지는 것 같고, (그렇게 오래 앉아있지도 않았는데 이건 다른 문제인가) 학문에 계속 뜻을 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노력할 일인가 의문이 든다. (사람일 또 모르지 2년 후에 어떤 바람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렇지만 왜 공부는 생각보다 재미있는지, 왜 수업시간에 입도 잘 떼는 동양인으로 활약(?)해서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그런 고정관념 있기는 하는지?)을 깨뜨리고 싶은지, 왜 지도교수에게 인정받는 학생이고 싶은지. 나는 왜 이런 나를 원하는가 피곤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내 삶의 구조여...


그냥 적당히만 해도 되는데, 왜 잘하고 싶을까? 적당히만 할까 했는데 그래도 잘하고 싶어. 그럼 일단 잘할 수 있는지 해보지 뭐.


그래서 최대한 읽어보자고 다짐한다. 아직 학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하나도 안 지쳤고 그렇다고 요령도 붙지 않은 때라 의지만 오른다. 이번엔 정말 자기만족 이외에 특별히 내게 돌아오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에휴 내가 좋은 게 제일 좋은 거니까. 아니면 고생하고 정신을 차리든가 호호.


그와중에 이사는 가게됐고. 이렇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정을 많이 붙인 곳이었구나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에서의 평등과 자유 관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