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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에 홀리다 Jan 29. 2020

캘리포니아의 비경, Valley of the Names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세상에는 특별한 곳이 많이 있다. 모양이 특이하다거나 빛깔이 이상하다거나, 다른 곳에는 없는 무엇인가 있는 등 지구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이상하다. 그런 곳 가운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좀 이상한 골짜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이름하여 '이름 골짜기(Valley of the Names)'가 그곳이다.


이름 골짜기의 시작은 이 정도다.


   이름 골짜기를 처음 들어서면 놀라는 것은 먼저 그 규모다. 사실 여기가 공식적으로 공원이나 어떤 유적지로 지정된 것도 아니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빈 곳 아무 데나 이름을 써놓고 가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 골짜기 인지도 구분이 안 간다. 크기는 대략 1,200 에이커라고는 하는데 계속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도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0년대 미군 훈련소가 이 근방에 있었는데, 이때 훈련받던 군인들이 모래 위에 주변에 있던 돌로 이름을 쓰게 된 데서 유래했다. 그 당시에는 '낙서 언덕(Grafiti Mesa)'으로 불리다가 그들이 철수한 뒤에도 이름 쓰기가 계속되면서 오늘날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이름들


   군인들이 이름을 쓰기 시작한 까닭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연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외로움  등을 그들의 이름을 써서 달래려 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쟁을 수행하던 그들의 고된 훈련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제한된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가진이들이 모여 같은 행동을 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라 그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어려움은 비슷했을 테니 '이름 쓰기'는 그런 그들을 달래줄 수단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물론 이름만 새겨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뒤부터 여기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한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1,200 에이커나 되는 넓은 곳을 빼곡하게 채워나간 그 이름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누구의 이름을 새기든 그들이 남기는 이름이, 새기는 이들과는 특별한 관계겠지만, 나중에 그 이름을 읽는 이들에게는 이름의 실체에 다가가기 어려워진다. 간간히 이름 옆에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단서가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달랑 이름만 있고, 그 이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줄을 긋거나 모양을 만들어 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돌을 하나하나 올려서 쓰는 글씨이다 보니 설명을 못하기도 할 테고, 처음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희미하게나마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굳이 거기에 쓴 이름이 사람들에게 읽히거나 불리기를 바라고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일차적인 결론이다. 그래서 자기들만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름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누군가 다른 이들이 와서 읽지 않아도 그 이름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름을 새긴 사람과 그 이름의 주인공의 관계에 있을 것이고, 그 관계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자녀관계, 형제나 자매, 연인, 친구, 그것도 아니면 은밀하게 짝사랑하던 연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보기만 해도 왜 새겼는지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여기에 새긴 이름은 묘비명이나 문패와는 또 다르다. 이름들 가운데는 간간히 죽은 이를 기리는 듯한 것들도 눈에 띈다. 그들은 다 그 이름 뒤에 실체가 그곳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이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새겨놓은 것이다. 어느 집 문에 새긴 이름을 그 대문 앞에 서서 부르면 그 이름을 가진 당사자가 나올 수 있다. 만일 그이가 집에 있다면. 그러나 여기에 새긴 수많은 이름들은 여기에 다만 이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상징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확인하는 그 이름들이 누구이고, 아니면 어떤 의미인지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면 과연 그들이 보편적으로 실존한다고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일까?  어떤 시인이 와서 이들의 이름을 불러봐도 그들은 나의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을 남기는 곳이 있다. 여행자들이 들락거리는 선술집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 그 가운데 특히 이름들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진지한 의미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진도의 팽목항에 수없이 나부끼는 깃발들과 이름들, 낚서와 메모들이 그렇다. 이런 행위가 땅에 새긴 이름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그들이 드러내는 상징의 무게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름을 새긴 이들의 참담함과 억울함, 분함과 그리움이 뒤섞인 말할 수 없는 분노의 외침이라는 점에서 저들이 어쩌면 재미 삼아 새긴 이름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일 것이다.

죽은 이를 기리는 듯한 이름도 눈에 띈다


    그렇다고 그들이 땅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가 이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존재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곳에 새겨진 이름들은 그저 이름을 새긴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 하나의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이 그 이름을 보고 새긴 이의 의도를 파악하기보다는 그 글씨가 드러내는 기호, 상징을 읽어내고 상상하다 보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이름이 있고, 그 이름들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가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는 지를 알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 어떤 조형물(사람이 만든 것)이 이 만큼 즐거운 상상을 이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복잡한 구조물, 건축물, 조각품, 각종 예술품들이라고 이처럼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단순한 작업이 이렇게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살면서 우리는 현실의 문제들에 골몰하다 보면 상상력이 고갈되고, 생활은 피폐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이런 곳에 한번 획 다녀오면 고갈되어 가는 상상력이 되살아날지도 모르겠다. 설령 이런 까닭이 아니라도 바람이라도 쐴 요량으로 다녀오면 기분전환에는 그만일 곳이다.


   가는 길은 샌디에이고에서 연결되는 프리웨이 8번을 타고 애리조나 유마에서 내려 피카초 로드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 들어가기는 애리조나지만 이름 계곡은 윈터헤븐이라는 캘리포니아 지역이다. 좌표는 "32.871181, -114.682405" 이므로 지도에서 찾아보면 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프리웨이서에 내려 들어가는 길은 대부분 비포장 구간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외진 곳이므로 차에 연료 채우고 먹을 물을 준비해 가는 것도 잊지 말자.

떠난 이들인 듯한 이름, 가족의 이름인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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