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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임 Apr 16. 2022

책꽂이

슬기로운 팬데믹 생활

나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내가 들어 있는 공간은 무엇일까? 타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마스크를 벗을  있는 유일한 공간. 나를 둘러싼 가장 가까운 환경은  방이다. 그중 가장  비중은 책꽂이다. 네모난  하나.  면은 창문, 마주본  면은 싱크대. 남은  면은 책꽂이다. 나는   책꽂이에 둘러싸여 있다.   넘게 이사하며 버리고 버린 , 현재 책꽂이에는 버릴  없는 추억과 지식과 위로와 가치를 담은 책들이 남았다. 나와 관계가 깊은 아주 개인적인 책이다. 책꽂이는 과거의 나이자, 현재의 나다.


책꽂이가 나라고? "여러분 책꽂이에서 가장 많은 책이 뭔가요? 그게 여러분이에요." 편집을 공부하러  강의실에서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만화책이 꽂혀 있지 않으면서 만화책 편집자를 지원하면  된다는 취지의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책꽂이에 가장 많이 있는 책이 바로 당신이 좋아하는 책이라고 알려주는 말이었다. 옷장보다 부엌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한 책꽂이가 있는 나의 방을 떠올리니 기이했다.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종이덩어리가 가득한 방이라니. 그런데 틀리지 않았다.   넘게 이사하며 버릴  있는 것은  버리고 남은 나와 같이 하고 있는 책덩어리는 나였다. 싫든 좋든 책꽂이는 버릴  없는 나였다.


 책꽂이는 말을 건다.   읽은 책을 다시 읽지 않는 편이다. 읽지도 않는 책을   버릴까? 책꽂이에 꽂힌 책은 책등만이 보인다. 책꽂이의 책들을 자주 빼들지 않는다. 하지만 자주 본다. 바탕색과 제목과 출판사 로고가 보인다. 정신없이  주를 보내고 주말 아침 게으르게 눈을 뜨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늦은 오전. 아무 약속도 없고 의욕도 없을 , 책꽂이를 패턴 없이 눈길이 헤맨다. 그러다 어느 책등에서 멈춘다.  책을 읽었을 ,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떠오르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제목에 눈이 머문다. '네가 나를 읽었을  생각나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는다. 책의 추억은 강력하다.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말을 듣고 기억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책등은 추억이다.


 책꽂이는 나를 지켜준다. 어느 날엔 책꽂이의 책은  방을 좁게 만드는 짐덩이다. 쓸모도 없고 먼지만 날리는. 사실 대부분 책꽂이는 조용하고 나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고 안전하게 구획을 짓고 있는 벽과 비슷한 모양새다. 그러다    찾을 일이 생겨 책꽂이를 자세히 보면 너무 아름답다. 분야별로 나눠서 꽂아둔 보람이 느껴진다. 식물책과 자연과학책을 모아둔 책꽂이, 그림책만 꽂은 책꽂이, 내가 만든 책만 모아둔 책꽂이, 편집일 시작하기 전에 공부했던 책을 모아둔 책꽂이, 최근 사들인 세련된 디자인의 책들이 모인 책꽂이 .    찾다가 책꽂이를 감상한다. 벽이었던 책꽂이가 어떤 그림보다 멋져서 잠깐 쉬며 감상한다. 책꽂이가 예술품이 된다. 책꽂이는 나를 위한 예쁜 그림이자 단단한 벽이다.


책꽂이는 나의 모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 만나는 일도 드물어졌고 사람이 있는 카페에도 가기 조심스러워서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2년이 넘게 내가 담겨 있는 .  방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말을 거는 물체는 책이 꽂혀 있는 책꽂이였다. 집을 좁게 만들어 치워야  물건 같다가도, 책이 그동안 위기를 넘게 해줬구나 싶다가, 그냥 봐도  예쁘다 싶다가, 종이책 따위에 매달린 삶이 걱정스럽기도 했다. 많은 감정을 나누었다. 방에 있는 시간이 길수록 ,  책꽂이를 마주하는 시간이 길었다. 다시 책꽂이를 본다. 책꽂이에 책을 채울 때가 되었다. 빈틈은 없지만  더미 위에 미래의 책을 쌓아야겠다. 방역이 해제되었다는 뉴스가 오늘 나왔다.  존재 이유를 찾고, 소중한 관계를 만날 준비를 해야겠다. 책꽂이는 나의 역사니까. 책꽂이는 나니까. 오랜만에 온라인서점 장바구니를 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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