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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정임 Feb 15. 2024

사적인 몰입의 추억 몇 가지

꿈을 버린 직업인 

몰입의 추억(1) 


*나는 일기를 열심히 쓰던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대학 노트’에 날마다 썼습니다. 언니 오빠가 사다 놓은 판형이 크고 두꺼운 노트였어요. 하루 일을 떠올리며 일기를 쓰고 나면 후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두세 페이지는 금세 써냈죠.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왔는데, 언니가 나를 놀렸습니다. 내 일기장을 본 것입니다. 친구를 흉본 내용이 우스웠나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일기장에 쏟아놓았는데, 가족들에게까지 떠벌렸습니다. 예상 못 한 일이었고 언니들과 싸워 본 적도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어요. 감출 수 없는 감정만 표정으로 드러났습니다. 고개를 숙였고 얼굴이 일그러졌어요. 


이후 자물쇠가 있는 다이어리가 있다는 걸 알고 새 일기장을 샀습니다. 엄지손톱만 한 자물쇠가 미덥지 않았어요. 아무 데나 두던 일기장을 자물쇠 채워서 책상 서랍에 꼭 넣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식구가 많은 집이었어요. 누군가 볼 수 있다는 걸 의식하고부터는 일기 쓰기가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엔 일기장에 필사를 하거나 했던 일을 끄적끄적 했을 뿐입니다. 점점 일기의 분량도 줄었습니다. 



몰입의 추억(2) 


*해마다 연말이면 나를 위한 선물을 합니다. 바로 다이어리입니다. 아주 꼼꼼하게 골라요. 양장 제본인 다이어리를 열면 표지 바로 뒤에 본문 종이와 다른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출판 일에 하고 나서 알았는데, 이를 ‘면지’라 합니다. 두꺼운 표지와 본문 용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죠. 본문보다 두꺼운 종이를 쓰고 보통 예쁜 색종이를 써요. 나는 이 면지가 좋았어요. 그래서 여기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써둡니다. 혹시 잃어버리면 연락해 달라는 의미로요. 그러고는 새해 목표도 적습니다. 단어로 쓰는데, 수십 년 동안 쓴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몰입’이에요. 


다른 사람, 어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지 않고 온정신을 다 기울여 열중하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무언가에 깊이 파고들거나 흠뻑 빠진 상태를 꿈꿉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입니다. 성격 때문인지 환경 때문인지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생각도 멈추고 행동은 어색해집니다. 나만의 하루를 돌아보며 몰입해서 일기 쓰던 시간이 늘 그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몰입하기는 쉽지 않아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몰입의 추억(3) 


*저는 편집자이면서 어린이책 작가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사뭇 다른 일입니다. 글 작가로 일을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모전’을 치릅니다.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책이 떠올라서, 그림책 공모전을 2년여 준비했습니다. 그림 작가님과 함께 준비했어요. 스케치를 주신 날, 원고와 스케치를 손수 붙여가며 가제본을 만들었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밤 9시쯤 시작했고, 12시 전에 끝내자 마음먹고 시작했어요. 


열두 장이 넘는 그림을 방안에 펼쳤어요. 나비 애벌레와 먹이식물 이야기였습니다. 겨울 풀밭의 앙상함을 지나 봄에 돋아난 풀에 나비들이 날아오며 시작하는 생태 그림책이었습니다. 봄의 풀밭에서 나비의 알이 애벌레로 깨어나 먹고 또 먹고 자라다가 번데기가 되기까지 한 장면 한 장면 글과 그림을 함께 보았어요.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가 날개를 펼치며 말리고 날아오르기까지 한 땀 한 땀 가제본을 만들었습니다. 


‘몇 시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3시? 벌써 새벽 3시라고?’ 


직장인에게 출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때 회사와 집의 거리는 걸어서 5분이라는 걸 선배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각을 라 무척 부끄러웠어요. 곧바로 가제본과 종이 조각들을 사삭 빠르게 치우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서둘러 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음 날 평범한 직장인의 생활은 이어졌어요. 


 


*몰입의 추억(4) 


교직 이수를 하던 대학 4학년. 교생 실습을 준비하며 역할극처럼 수업을 준비했어요. 수강생이 돌아가며 선생님 역할을 했고, 나머지 수강생은 중학생 역할을 하며 실습을 준비했습니다. 교수님도 학생의 자리에 앉아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꿈은 무엇이었나요?” 


교과 내용에서 벗어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데, 교탁에 서서 자신감이 생겼는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답했어요. 


“선생님 꿈은 뮤지컬 배우였어요.” 


내 답을 듣고 가장 놀란 것은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의 꿈이 뮤지컬 배우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선생이 아닌데 종종 질문을 받습니다. “좋아하는 걸 해야 할까요? 잘하는 걸 해야 할까요?” 직업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저는 감히 좋아하는 것 말고 잘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추천합니다. 미래에 어떤 직업이 필요할지 알려줄 수 있는 직업에 대한 책을 만들자는 기획 제안을 받기도 합니다. 사람은 복잡하고 사회는 계속 변하고 게다가 최근에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서 직업 선택의 기준과 각자 처한 환경을 감안하지 않은 답변은 무책임하다고 느낍니다. 미래의 직업은 알 수 없어서 직업 관련 어린이책은 아직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 공모전 결과는 어땠나고요? 떨어졌습니다. 공모전에서 당선되지 않았지만 이를 준비하며 경험한 몰입이 저의 진로를 정해주었습니다. 몰입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었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을 만드는 일에 시간이 '순삭'하는 경험을 했고, 이 일을 내가 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불현듯 찾아올 몰입의 순간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도 뮤지컬 배우는 꿈. 누군가 지금이라도 꿈을 찾아 뮤지컬 배우를 준비해보지 않겠느냐고 한다면 수줍게 답할 것입니다. “하고 싶지만, 저는 몰입이 가능한 일을 할게요.” 


❝몰입의 즐거움에 대해 학술적으로 알려준 책이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다. 몰입(Flow)은 1975년 칙센트미하이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몰입의 의미는 ‘어떠한 활동을 할 때 심리적으로 완전히 몰두한 심리 현상이면서 별다른 수고 없이 활동에 빠져 계속하고 싶은 마음의 상태’로 정의된다.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인 몰입, 칙센트미하이가 1990년에 쓴 “몰입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면 개인이 최적의 경험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상태인 ‘플로우’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플로우란 활동에 몰입하여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완전히 충족되는 경험을 말한다.❞ -<기획회의. 599호> 


빠르게 흐르는 시간! 몰입이 행복이라니! 공모전을 준비하던 그날을 왜 늘 꿈꾸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의 만족감이 행복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순간을 꿈꿉니다. 

오늘도 나의 노동요는 악뮤의 다이노소어입니다. 잘 깎은 연필도 준비합니다. 스탠드 조명도 두 개 켭니다. 책상 위 먼지도 그때 보입니다. 닦고 또 닦습니다. 보고 싶은 영상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톡과 문자도 종종 울립니다. 게다가 하기 싫다는 마음도 자꾸 샘솟습니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몰입을 꿈꾸며, 나의 플로우를 마음속으로 그려봅니다. 프로이드도 말했습니다. “사랑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 (행복이) 찾아온다” 

몰입은 행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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