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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안온한 날들

-제법 안온하지 않은 일들을 제법 안온한 날들에 기록하고 기억하다


 "오늘 세시쯤 여기 도착해서 원고지 2000자 분량의 글을 썼고요...."

그는 북콘서트에 참석한 청중들을 향해 자신의 오늘 하루를 덤덤하게 풀어냈다.

 강의실 맨 앞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내기가 부담스러웠던지 그는 연단 한편에 놓인 교탁 뒤에 숨어서야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마스크 뒤에 숨은 그의 표정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나는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오늘 북콘서트에서 다룰 이 [제법 안온한 날들]도 단지 '안온하다'는 단어 하나 때문에 신청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이니, 마스크 뒤에 숨은 그의 얼굴 표정은 별로 안온해 보이지 않는 그의 눈 표정 같은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쓸데없이도......


 남궁인 작가의 [제법 안온한 날들] 북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시 통합 예약시스템에서 접하고 난 뒤 하루 정도를 고민하고 신청을 했다. 하루 고민한 이유는 우선 그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가 의사 작가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책을 읽어보면 해결될 일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책을 읽은 후에 역시나, 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청을 취소하면 그만이었기에 나는 그의 '안온하다'는 제목에 이끌려 다시 통합 예약시스템에 들어가 신청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29일, 나는 어마어마한 하루 일정을 불량하게 소화하고 후줄근한 차림새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의 소회의실에 들어갔다.


 교탁 뒤에서 제법 편안해진 눈빛으로 준비해온 PPT 화면을 켠 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일터인 응급실 현장에서 경험한 일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교단 한가운데부터 교탁 뒤 일말의 망설임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정확히 7분이 걸렸다. 그 7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뒤에 그의 작가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의심의 여지없는 의사의 모습으로서 응급실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준비해온 PPT와 함께. 순간 북콘서트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과 함께 통합 예약시스템의 화면을 재빨리 열어 내가 신청한 프로그램 이름을 확인했다. 아뿔싸! 예약시스템에 적힌 프로그램 명은 「독서의 달 남궁인 작가 특강 」이었다. 그렇다 특. 강. 그는 정확히 특강의 형식에 맞춰 청중들에게 강의했다. 그러니 내가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명목은 사라진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써내려 갔을까? 그가 자신의 경험담을 덤덤하지 않은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들려주는 사이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되물었다.   [제법 안온한 날들]을 쓴 사람은 분명 의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사의 시선으로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없어.'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의 의문에는 아랑곳없이 그는 응급실을 찾아오는 숱하게 많은 환자들 개개인의 속사정과 응급실을 찾아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 치료 후의 이야기들, 회복, 죽음, 안타까운 연명, 감옥 같은 일상으로의 회귀 등등을 들려주었다. 그는 준비해온 PPT 화면을 착실하게 넘기며 자연재해와 아동학대, 산업재해, 가난으로 인한 질병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 손을 거쳐간 환자 한 명 한 명의 사연과 그 환자들이 그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원인에 대해,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그 안타까움들에 대해 대. 단. 히. 덤덤하지 않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분석했다.


 대. 단. 히.

그가 환자들 개개인의 속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쓴 단어.

"대. 단. 히. 안타깝고 기괴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이 단어가 두드러지게 들린 것은 아마도 그가 발음한 이 단어에서 미세한 망설임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나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가슴 아픈 그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억눌러, 그래서 대. 단. 히.라는 말로 밖에는 그 이상의  마음 상태를 표현할 길 없어 쓰게 된 말. 그는 그 말을 쓸 때 망설이고 안타까워하며 탄식했고, 그럴 때는 영락없는 작가였다.


 사실 나는 비문학계에 있는 사람들이 낸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글은 비문학이라는 영역의 힘을 빌어 문학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와서는 버젓이 문학인 척 독자들을 기만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전업작가들이 쓴 에세이와 시 소설을 좋아한다 -물론 전업작가라고 해서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가들이 쓴 글은 언제 어느 시점에서 펼쳐보든 결국 문학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흘러 모습은 변하더라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철학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비문학자들이 쓴 에세이와 시 소설은 시간이 지난 후에 펼쳐보았을 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나 사례들을 쓴 글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문학가가 전문적인 지식이 가미된 소설을 쓴 것은 좋아하지만 - 가령 의학 스릴러물을 많이 쓴 스티븐 킹이나 태엽 감는 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묘사한 노몬한 전투, 향수 제조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와 같은 - 비문학가가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와 쓴 개인적인 에세이는 글쎄... 이것도 결국 어불성설 선입견일 뿐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그렇다. 무릇 작가는, 소설은, 시는, 에세이는, 이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 나는 말도 안 되는 편견에 사로잡힌 40대 아줌마일 뿐이다.


 그가 대. 단. 히.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탄식 섞인 마음을 나타냈을 때 나는 그가  [제법 안온한 날들]을 쓴 작가로 돌아와 이 특강을 북콘서트로 이어가길 바랐다. 조금 어정쩡하고 말을 더듬더라도, 자신이 쓴 책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 영 어색하고 민망하고 예기치 못한 질문에 당혹스러워하더라도 그 책을 썼을 때의 생각과 감정, 그런 문장을 혹은 그런 단어를 쓰게 된 과정에 대해, 의사가 아닌 모습으로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정확히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보였던 그 7분 간의 모습으로 그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찾아온 청중들을 대하기를 바랐다. 나는 정말로 마스크 뒤의 그의 표정이 궁금했다. 의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천태만상의 사연을 지닌 환자들을, 연인을, 사랑과 삶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은 어떨까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의사라는 사실을 안다. 그것도 응급의학과의 임상조교수라고 한다. 그가 응급의학과 의사로 몸담은 지도 어언 15년이라고 하니, 그의 언어는 역시 의사였을 때가 가장 안정적이고 확신에 넘칠 것이다. 그가 아무리 문학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이고 지극히 문학적인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일상을 만들어내는 루틴은 무서운 법이다. 내가 어떤 자질과 성격을 지녔든지 간에 루틴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사람은 자신이 보내는 일상에 의해 완성된다.


 하여 나는 미련을 내려놓고 그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의 경험들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야기하려는 단호한 눈빛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뒤 한 시간 반은, 응급실에 찾아온 환자들의 사연이 얼마나 절실하든, 끔찍하든 혹은 잔혹하든 정말 야속할 정도로 사실과 현상에 입각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졌다. 누가 들어도 탄식과 탄성 흐느낌이 나오지 않고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는데도, 그의 단호한 눈빛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청중의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가 본 청중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몇 번이나 눈을 질끔 감아야 했다.


 두 시간을 꽉꽉 채운 그의 경험담은 무겁고 뻐근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끝이 났다.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대. 단. 히. 가 되었고, 마음을 쓸어내리느라 청중들을 위한 마지막 짤막한 Q&A 시간을 놓칠 뻔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가 누구였는지, 그런 대단한 일들을 겪고도 멘탈 케어는 어떻게 하는지 등의 Q&A가 서너 차례 오간 뒤에 나는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책에 대해 질문할 생각이 들었다.


 "잠은 제대로 주무시나요? '생활'이라는 소제목대로 생활한다면 잠이랑은 아예 인연이 없을 듯싶어서요."


"작가님의 책에는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그 사랑 이야기들을 읽어보며 문득 이 이야기들이 과연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 감성과 문체를 느꼈습니다.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나의 이 두 질문에 그는 당혹감을 느꼈을까? 모르겠다. 특강의 형태에 맞게 독자들의 질문 역시 대부분 병원생활에 국한된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고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정말로 당혹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대답할 말을 고르느라 잠깐의 간극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숨을 한 번 돌리고, 눈을 한번 굴리고 마이크를 다시 바로잡은 다음, 숨을 고른 뒤에 서툰 자세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 우선 잠은 물론 제대로 자고 있습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24시간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근무가 없는 날에 집에서 충분히 자니까요. 사실 '생활'이라는 글을 쓸 때는 아직 응급의학과 의사로 일하고 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소방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많고 아직 30대였기 때문에 30대라면 이 정도 기준은 가지고 생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적은 나름대로의 생활 지침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땐 '생활'에 쓴 그대로 한 달에 20권 정도의 책을 읽고, 한 달에 한번 시낭송회에 참석하고, 주말 하루는 축구를 하고 평일 하루는 음악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럴만한 시간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젠 40 대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마스크 뒤에 멋쩍은 웃음). 책은 여전히 많이 읽긴 하지만...... 네, 기회가 된다면 40대의 생활 지침서를 다시 쓸까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실 [제법 안온한 날들]에 실린 사랑 이야기 역시 모두 5년 전에 쓴 것들입니다. 역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였는지 그땐 그런 감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요. 또 당시에는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요, 그분 책은 거의 모조리 읽었습니다. [제법 안온한 날들]에 나오는 문체가 독특하게 느껴지셨다면 그건 아마도 그분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아, 그랬던 거구나. 그제야 비로소 풀리는 의문. 나는 그가 말한 작가가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어쩐지 그 어떤 설명보다도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문체를 닮아간다는 것, 모방하게 된다는 것. 그건 무척 즐거우면서도 슬프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 일이지만 역시나 다시금 펼쳐보고 읽어보게 되는, 나도 모르게 한 글자 한 글자 고치고, 바꾸고, 바로 세우고, 색을 입히고 꾸미게 되는 것. 그러고는 다시 읽고 한숨을 쉬게 되는 것.


 특강이 끝나고 독자들 몇몇이 책에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연단 앞으로 나갔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손에 든 책이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마지막 대답이 너무나도 흡족했기 때문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대답 하나로 나는 그를 알게 된 듯했고 이렇듯 매혹적인 글을 쓰는 그가 작가로서 한층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그의 사인을 받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기억하고 싶으면 나는 이제 그의 책을 펼쳐 그가 쓴 이야기를 읽고, 그가 내게 들려준 대답을 떠올리면 될 터였다. 40대에 들어선 그가 자신의 자리에서 40대가 지킬 수 있는 생활지침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과연 다음 책에 40대의 '생활'이 이야기로써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설사 두 번 다시 '생활'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읽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물론 괜찮다. 그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마음에 담으며 열심히 하나의 목숨을 살리고 있을 테니까. 그 목숨이 절실한 것이든, 안타까운 것이든,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기괴한 것이든 그는 작가로 돌아와 그 이야기들에 다른 색을 입히고 쓸 것이다. 나는 흡족해진 마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서점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남궁인 작.가.의 제법 안온한 날들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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