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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otrekker Apr 07. 2016

신들의 거처, 사소 델라 크로체

돌로메테 트레킹 4일


[트레킹 4일: 8시간 30분]

세네스 산장 → 페데루 산장 → 파네스 산장(점심) → 사소 델라 크로체 → 파네스 산장


베네치아Venezia에 머물면서 괴테가 들렀다는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의 플로리안 카페를 보고도 감흥이 별로 없었는데, 괴테가 알프스를 넘어올 때 적어놓은 글을 읽을 땐 달랐다. 인스브루크Innsbruck를 지나 볼차노Bolzano로 향하면서 괴테가 마주한 동알프스는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가로질러 온 알프스의 석회암은 회색에다 아름답고 특이하며 고르지 않은 형태를 지니고 있다. 비록 수평 층과 물결 모양의 층으로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휘어진 층도 나타나고 대체로 일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풍화되어 있어서 암벽과 산봉우리들이 기이하게 보인다. 이러한 종류의 암석이 브레너 고개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호수의 상부 지역에서도 암석이 이와 같이 변화한 모습을 발견했다.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


트레킹 4일째, 그가 보았던 풍광은 내가 볼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괴테가 넘은 산군 주변을 걷는다.


세네스 산장 앞 초원. 돌로미테 내에서는 비박이 금지되어 있는데 저들은 하룻밤 신세를 졌나 보다.


걷다 보면 산악 마라톤이나 산악 자전거를 즐기는 이들을 가끔 마주친다.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마을이 아닌 곳을 지난다.



이곳 트레일에는 마을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 끝이 아득하기만 한 돌로미테 산군에서 만나는 사람이라곤 일행과 트레커들이 전부. 한나절 풍광에 취해 걷다가 점심 때면 불현듯 나타나는 산장은 낯설다.


세네스 산장을 출발하여 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마을을 만난다. 작은 교회도 있는 걸 보면, 예전엔 사람들이 적잖게 살았던 마을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은 아닐까.

오대산 선재길을 걷다 보면 화전민이 살던 곳을 지날 수 있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무너진 돌담으로는 그곳에서 과거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삶을 일궜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60년대까지도 화전민들로 북적였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기까지 하다. 휙 지나가는 이방인이 타지의 뭇 삶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매번 몇 안 되는 단초로 재단하려 애쓰는 몸쓸 버릇은 여태 버리지 못했다.



1960년경 군사용 목적으로 닦인 가파른 포장도로를 내려오다, 무릎이 시큰할 때 즈음 페데루 산장Rifugio Pederu에 다다른다. 새로 지었는지 깨끗하고 규모도 크다. 차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 사람도 제법 많다. 굳이 트레킹이 아니어도 후에 이탈리아에 온다면 다시 한 번 들러보고 싶다. 뜨거운 태양에 마른 몸을 과일로 적시며 잠깐 쉰다. 적당히 내려섰으니 이제 또 적당히 올라야 한다.


적당히 내려서고 또 적당히 올라가고. 이 고개 넘어 파네스 산장이 있다.



젊은 처자가 지나가는 트레커들에게 커피를 판다, 팔아야 하는데 책만 읽는다.


파네스 산장. 좋은 곳이다.


없던 입맛도 살아날 식탁이 아닐까.


5일 트레킹 일정 중 가장 긴 시간 동안 걷는 날이다. 햇빛도 뜨겁고 땅은 메말랐다. 일행은 조금씩 지쳐 힘든 기색을 보일 법도 한데 무던하게도 걷는다.


돌로미테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파네스 산장Rifugio Fanes에 도착했다. 여느 산장처럼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 곳이다. 파네스 산장 주변으로는 작은 집들과 함께 바렐라 산장Rifugio Varella이 있다. 과거 티롤 지역이었던 이곳 산장 사람들은 독일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며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곁들이는 느낌이다. 외지고 고립된 곳이다 보니, 간혹 이탈리아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물론 5개국어에 능통한 파네스 산장 주인같은 사람도 있다.


또 다시 짠 점심을 먹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사소 델라 크로체Sasso Della Croce, 십자가의 돌로 향한다. 사소 델라 크로체 트레킹은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


베르데 호수. 오른쪽 위의 건물이 파네스 산장.


베체이 봉과 파네스 산장을 보며.


베르데 호수Lago Verde를 지나 본격적으로 오른다. 경사가 급한 곳도 있지만 사소 델라 크로체까지는 완만하게 오른다.


가이드는 사소 델라 크로체를 거대한 백운암의 첨탑들이 성처럼 둘러쳐진 형태로 층계 성층암들이 겹겹이 그 바닥을 이루고 있다며, 이곳은 신들의 거처라 묘사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사소 델라 크로체는 거대한 카르스트 지형이자 습곡 지대다. 퇴적, 융기, 습곡, 침식, 용식 등으로 인해 형성된 살아있는 과학 전시관이나 다름없다. “회색에다 아름답고 특이하며 고르지 않은 형태” 괴테가 본 알프스는 바로 이런 곳이었을테다.


트레킹 내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눈으로 본 건 모조리 찍겠다 했는데,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사소 델라 크로체는 찍지 못했다. 사진 폴더를 죄다 뒤져보았지만 없다. 트레킹 마지막 고지라 긴장이 풀려서일수도, 태어나서 처음 본 에델바이스 때문일수도 있겠는데, 회백색 장막의 웅장함에 빠져 사진 찍는 걸 깜빡했다는 흔한 변명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하다.


거대한 카르스트 지대



에델바이스, 눈 크게 뜨고 열심히 찾아야 볼 수 있다.


사소 델라 크로체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에델바이스를 볼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엄지 손톱만 한 게 앙증맞다. 따뜻한 볕이 드는 산장 뜰을 피해 하필 강한 바람 부는 척박한 이곳에 여린 꽃을 피었는지 알 길 없지만, 그래서인지 신비롭다. 오늘 가장 거대한 산봉우리, 그리고 가장 작은 꽃봉오리와 함께 했다.





내일이면 산에서 나간다. 늦게까지 담소를 나누던 일행이 모두 방으로 들어간 파네스 산장 밖, 홀로 아무런 생각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고민도 잡념도 없다. 해거름에 부석사에 올라 서쪽 하늘이 어두워지도록 아무런 생각 없이 서있던 지난겨울의 어느 날처럼. 무량수전에 들어 기복 따위 없이 그저 아홉 번 절하고 나와 단양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처럼. 트레킹 내내 하루하루 지나가는 걸 아쉬워하고 서운해 했는데 막상 마지막 날 밤 홀로 앉아 있던 시간, 더할 나위 없이 편했다. 어느새 자정, 잠깐 앉아 있었다 생각했는데. 그만큼 평화로웠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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