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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에이 Jun 27. 2019

그녀는 밀물이었다

뭍이었을까, 바다였을까…그 길은

그녀는 밀물이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자리하나 싶더니, 어느새 다가와 두 발을 적셨다. 그녀는 썰물이었다. 발목 위로 심장을 지나 목까지 차오르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아득한 바다로 돌아갔다. 그리움이란 파편만 남겨 둔 채. 누구에게나 가슴 속엔 이별이 남긴 조각들이 있다. 빼내려 하면 할수록 깊이 박히는 바늘이 돼 늘 그 자리에 있다. 이런 열병 같은 사랑을 주제로 관광지에 지나지 않았던 제부도를 문학의 향기가 나는 여행지로 탈바꿈시킨 작품이 있다. 소설가 서하진이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그’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라고 말한 소설 <제부도>다. 소설 속 두 남녀의 사랑처럼 오늘도 제부도엔 바닷길이 열리고 있다.    

                                                                                        

사랑과 이별 사이에는 통로가 존재한다. 헤어졌을 때만 보이는 길이다. 마치 물이 빠지면 열리는 바닷길처럼 나타난다. 해수가 떠나버린 제부도 바닷길을 걸어 본 적이 있는가. 그곳에는 바닷물이 남기고 간 자취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빈 껍질만 남은 조개며 썩어버린 해초 따위다. 이런 보잘것없는 것들은 썰물 때 같이 따라 갔어야 했다. 그런데 지천에 널린 싸리꽃 마냥, 길가에 덕지덕지 온몸을 붙이고 무언가를 기다린다. 소설 속 ‘그녀’처럼. 어려서부터 첩의 딸이라 놀림을 받은 ‘그녀’와 유부남이었던 ‘그’는 처절하고 버둥거리는 사랑을 했다. 그래서일까. 제부도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들의 흔적은 짠 내 나게 애잔하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 싸리꽃

몇 해 전 봄이었다. 연분홍빛 눈송이들이 온 천지에 흩날릴 즈음이었다. 그날의 벚꽃은 함박눈의 또 다른 이름 같았다. 괜스레 설레 흐드러진 벚꽃을 보며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도착한 곳은 제부도 가기 전, 사강쯤 어디. 양옆 도로가에는 고운 색으로 단장한 벚꽃들이 한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쪽 구석에서 기죽은 듯 눈치를 보며 피어 있는 꽃을 보았다. 그것이 흔하디흔한 싸리꽃과의 첫 만남이었다.    

「아무도, 싸리 꽃을 꺾어 봄을 맞으려 하지 않았다. 노란 개나리를 안 쓰는 물동이에 꽂아두거나 진달래, 철쭉을 따서 머리에 꽂아 보던 아이들도 싸리꽃에는 눈을 주지 않았다」(소설 <제부도> 중에서)     

그랬다. 봄만 되면 싸리꽃은 외로웠다. 진달래에 치이고, 철쭉에 치이고, 벚꽃에 치였다. 다른 꽃들은 봄의 전령사를 자처하며 화려한 자태를 뽐내기 바빴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싸리꽃은 속으로 열병을 앓아야 했다. 여느 꽃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었으리라. 어쩌면 어려서부터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던 ‘그녀’에게 싸리꽃은 본인의 모습이 투영된 물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그녀’도 봄만 되면 심한 열병을 앓았다.    

「열병 끝에 갈라져 딱지 앉은 입술을 달싹이며 주문처럼 되뇌이던 여자 애의 말소리. -“나는 달아날 거야. 나는 달아나고 싶어. 달아나고 말거야”-」(소설 <제부도> 중에서)     

아무도 몰랐다. 어린 ‘그녀’ 안에 잠재돼 있었던 그 절실한 욕망을.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빨리 싸리꽃이 지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제부도의 계절은 ‘간절기’

늦은 더위가 잦아들 무렵 제부도를 다시 찾았다. 지천에 깔려 있던 싸리꽃은 ‘그녀’의 바람처럼 이미 져버린 후였다. 모든 장소엔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 김유정이 살아 숨 쉬는 춘천은 봄이 생각나고, 황순원의 작품이 진하게 스며든 양평은 여름에 가깝다. <제부도>도 어느 한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계절과 계절이 만나는 무채색의 간절기다.     

「물이 차오르는 시간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섰던 바다가 수 천 수만의 팔을 벋어 엉겨 붙으며 만나는 시간이다. 섬이 육지와 만나는 사이 바다는 서로 길 양편으로 갈라서고 다시 바다가 만날 때 섬은 뭍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것은 영원한 이별일까. 계속되는 만남일까.」(소설 <제부도> 중에서)     

제부도에서 물때를 기다려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바닷길이 열릴 때 그곳엔 바다도 아닌, 육지도 아닌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봄과 여름, 혹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시간처럼 말이다. 소설 <제부도> 속의 두 남녀도 그랬을까. 자신을 펼쳐 보이지 못하는 소극적인 ‘그녀’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는 ‘그’는 불륜이라는 줄 위에 올라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하지만 아무리 뜨거운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차가워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위험한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이 정해져 있다. ‘그’ 가 먼저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길에 몸을 감추었고, 후에 ‘그녀’도 ‘그’가 갔던 길을 따라갔다. 둘은 자신들도 모르게 사랑과 이별의 중간 지점인 어느 곳을 찾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제부도의 바닷길을 달렸다. 처음에 왔을 때는 서해안의 관광지였다. 다른 섬들과의 차이는 하루에 두 번 열리는 바닷길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린아이 마냥 종일 바닷길에서 조개 따위를 주웠고 물이 언제 차오르나 기다리며 설렘에 달뜨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섬에서는 늘 가슴 한켠이 불안감에 휩싸이고는 했었다. ‘배가 뜨기 전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라는 묘한 두려움이 내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곳이 주는 폐쇄성을 말이다. 밤만 되면 사방이 암흑으로 둘러싸인 성 같다는 것을. 다행히도 제부도는 시간이 되면 바닷길이 열린다. 꼭 계절과 계절을 이어주는 찰나의 시간처럼 바다가 갈라지며 길이 드러난다.

 

지독한 사랑이었을까

단편 소설 <제부도>는 서하진 작가의 소설집 《책 읽어 주는 남자》에 수록된 열 편중의 한 작품이다.  소설집에서 작가는 여섯 편을 불륜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책 읽어 주는 남자》 속의 다른 작품인 <그림자 당신>에선「아내가 안고 있는 남자, 내가 끌어안은 여자들이 서로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소리가 없었고 아내도 나도, 여자들도 남자들도 얼굴이 없었다. 얼굴 없는 내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라고 표현을 한다.

《책 읽어 주는 남자》 출간 발표회에서 “왜 그리 불륜에 집착하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실체가 불분명한 존재들 사이의 불완전한 관계를 말하는 데 불륜에 기대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라고 작가는 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쫓는 것 역시 허구라는 말이다. <제부도>에 등장하는 두 남녀를 ‘그녀’와 ‘그’로 명칭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이름이 아닌 3인칭 대명사를 써서 소설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 역시 분명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었다. 서하진의 소설에서 불륜은 사회적 보편성인 도덕의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조하는 장치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허상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제부도> 속의 사랑 이야기는 모질어도 너무 모질다. 두 남녀가 각자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결말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를 관찰하는 듯한 주변의 시선들은 여간 지독스럽지 않다. 특히 ‘그’와 같이 갔던 식당에 다시 혼자 갔을 때, 느낀 이런 -「플라스틱 통에 꽂힌 수저들이 흰 종이 가면을 쓰고 나를 보고 있다.」「오목한 스테인레스에 비친 내 얼굴이 이지러진 눈으로 나를 본다.」,「빈 술병이 검은 눈으로 나를 본다.」,「손님 없는 탁자들이 오롯이 내 젓가락질을 보고 있다.」(소설 <제부도> 중에서) - 감정들은 처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했다. 어릴 적부터 남의 눈치를 받으며 살았던 ‘그녀’에게 아무도 없는 공간은 그토록 낯설었던 것일까. 아니면 위험한 사랑에 대한 자책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기척이라도 느꼈던 것일까. ‘그녀’의 모습이 유난히 안타까운 이유다.    

「그가 갔던 길을 가보리라. 그가 사라진 곳으로 가리라. (중략) 앞 유리까지 밀려드는 파도를 와이퍼로 밀어내며 나는 물소리와 차의 끼륵거리는 신음소리, 그 가운데서 나를 부르는 그의 아득한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가요. 나직이 내 앞을 막아서는 바다. 춤추는 바다를 나는 그 파도를 닮은 손짓으로 밀어내며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소설 <제부도> 중에서)     

두 남녀가 바다로 떠났던 그 길 위에 서 있다. 지금은 뭍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그냥 썰물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밀물이 돌아오기 전까지 기억해 주는 장소라고 해두자. 그래야 덜 외롭지 않겠나. 저 너머에서 아주 조금씩 밀물이 들어오는 것 같다. ‘그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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